대중춤과 예술춤의 융합으로 대성공을 거둔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일명 비.사.발.)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당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대척점에 있던 브레이킹와 발레가 만났다는 것 자체로 화제가 되었으며, 춤이 강한 뮤지컬이라는 의미에서 ‘댄스컬’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때가 10여 년 전일 것이다. 현재는 모든 것에 대해 경계가 없어진 컨템포러리 예술이 대세인 시대이다. 굳이 장르 간 융합을 강조하는 공연은 특별한 목적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서울시 대표 비보이단 갬블러크루와 현대무용단 고블린파티가 협업하고 서울문화재단에서 제작한 <얼쑤, 얼쓰>(2023.6.30.-7.1.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특별함을 기대한 것은 괜한 욕심이었을까. 왜 이 공연에서는 ‘얼쑤’라는 추임새의 흥겨움도, ‘얼쓰(Earth)’의 생생한 현장감도 찾기 어려웠을까.
이질적 춤의 화합이라는 기획에서 전제되는 것은 시너지효과이다. 즉, 두 장르가 단순히 물리적으로 결합하거나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융합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장르간 협업은 서로의 강점을 살리고 배려하며, 단점을 보완하는 형태였으면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바램이다. 현대무용과 브레이킹의 융합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하겠다는 <얼쑤, 얼쓰>의 기획은 공연 전부터 양 장르의 팬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기획은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말았다.
<얼쑤, 얼쓰>는 ‘렉처 퍼포먼스’ 형식을 취하였다. 이는 마치 브레이킹를 처음 접하는 관객들을 위한 교양 콘텐츠처럼 보였다. 그리고 대사의 스타일은 아동극을 보는듯한 인상을 주었다. 제목은 말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끼리도 춤이라는 언어로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의도를 표현한다. 프로그램에 나온 작품 설명에도 “춤으로 듣는 소통의 시간”을 관객들과 나누고자 한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쑤, 얼쓰>는 ‘춤’보다 ‘말’이 지배한 공연이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주요 2인의 출연진은 대사와 용어풀이를 틀로 잡아서 현대무용+브레이킹의 동작구를 재구성하였다. 춤 공연인데 ‘춤’보다 ‘말’이 많은 것은 관객들이 쉽게 공연을 이해하도록 돕는 장치일 것이다. 그러나 공연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춤의 세계 속에 빠져 이야기를 발견하려 했던 관객들은 다른 사람의 잔치에 구경을 간 듯 소외감이 들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번 공연은 ‘춤’의 언어라는 것이 미묘하고 복잡한 의미체계이며,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말’의 언어 이상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드러내었다. 이런 점은 세계 여러 나라의 전통춤을 소환해서 재해석했을 때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10명의 현대무용수와 비보이들은 세계의 다양한 국가의 전통춤을 현대무용과 브레이킹의 테크닉으로 재해석해서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듯이 다채로운 무대를 펼쳤다. 하지만 공연 이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안무가들은 각 나라의 춤을 재구성하였다는 극 속 멘트와는 달리, 충분한 리서치보다는 느낌(감)으로만 공연을 구성하였다고 말했다. 즉, 여러 전통춤을 음악적 느낌에 기대어 표피적이며 가시적으로 차용하고 소품처럼 사용하였다. 다른 나라의 전통춤에 대한 존중감과 각 전통춤이 갖는 의미를 깊이 있게 탐색하는 노력이 아쉬웠다.
공연 중에는 두 장르의 춤꾼들이 현대무용의 미니멀하고 섬세한 동작과 비보잉의 크고 역동적인 동작을 절충해서 함께 추는 신이 다수 등장하였다. 그러나 동작들이 완전히 소화되어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기에는 불편해 보이는 모습이 빈번하게 보였다. 비보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즉흥적으로 화려하고 테크닉적인 부분을 부각하지 못한 채 간간이 브레이킹 솔로가 나올 때 그리고 커튼콜 이후 브레이킹만의 무대가 펼쳐질 때 가장 편하고 공연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때 몸의 언어는 춤의 장르를 넘어 소통하고 교감하는 힘이 있다. 장르 간 경계선을 넘어서는 춤 언어의 소통은 단순한 결합이나 나열이 아니라 무용수들의 열정적인 에너지와 춤에 대한 진실된 마음이 화학적 융합을 일으킬 때 가능할 것이다.
리뷰참여_ 김수인, 김유정, 박재숙, 송준호, 오정은
대표편집_ 김수인
사진제공_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