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입체기둥
흐름은 야기한다
모든 것이
모두 존재하면서
모든 것으로
따라서 그것으로
심지어 그것으로
모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말하자.
사무엘 베케트의 시 <서투른 시>의 일부, 1976년 경에 쓰임.
몸은 부유하고 흐릇하다. 연기에 가득 차 있다가 한순간 맑아지며 예리해진다. 몸은 끊임없는 대비들을 결정하며 새로운 실체를 탄생시켜간다. 매순간 장소와 시간이 달라지며 몸은 압류된 인식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출한다. 극도의 성실성과 기나긴 연대로 이루어진 동반을 부수고 나온다. 몸은 삶과 일체화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진 동일성의 근거를 찾아가려는 듯이 애쓴다. 몸엔 바람이 머무르고 난이 피었다가 진다. 몸엔 거미줄이 머무르고, 누군가의 베게가 머무르고,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머무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 잠시 피었다가 진 난을 찾는다. 새벽엔.
호드윅스의 <새벽>은 몸이 지닌 새벽의 비밀에 집중한다. 새벽은 비밀이 리듬을 가지는 시간이다. 새벽엔 무엇을 위해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 가는가에 대해 열리는 시각이다. 비밀은 열린 감각이 있어야 촉지되는 감각이다. 운동하는 4개의 물성은 새벽의 하얀 앵두처럼 무대에서 벌어진다. 갈라진 갈대 속에서 벌레가 바람을 마시듯이 입을 벌리고, 머리카락이 말라서 흰 보푸라기가 되듯이 점점 가늘어진다. 그들은 푸른 잉크로 들어온 제비처럼 취하고 사막이 산에 쌓이듯이 부드럽다. 새벽은 신체가 가진 비밀의 가능성을 더욱 요구한다.
한 사람의 몸은 나비의 입속에 북풍이 쌓이듯이 한기를 표현하고, 한 사람의 몸은 새벽 산에 꽂혀 있는 삽 위의 흰 빛처럼 떤다. 한 사람의 몸은 검은 기차가 지나간 자리를 상상하다가 선로위로 올라와 가만히 귀를 대어보는 물개처럼 조심스럽고, 한 사람의 몸은 먼 곳을 떠나온 여행자의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이슬처럼 구른다. 그들은 서럽게 몸을 풀었다.
이 새벽의 비밀을 어떻게 풀것인가? 비밀의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조건들의 연산을 지워야만 한다. 칸트의 비판적 사고의 중심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세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비판을 조직한다. 하지만 이러한 축을 인간의 몸이나 미적지각으로 옮기는 것은 조심스럽다. 칸트 역시 미란 주관적 의의에 있어서는 추리작용도 아니며 실리적 이익도 수반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라 명명했고 대상이 아무런 공리적 개념도 수반하지 않고 인식되어지는 경우에 성립된다고 말하지 않았나. 피히테의 제 1견해를 떠올려 본다. 미는 존재하지만 객관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정신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무용 예술은 가장 구체적인 몸을 통해 이 아름다운 정신의 표현이란 것에 축척되어 왔다. 벌거벗은 이들의 세계에 우리는 어떤 조건들을 씌우려고 하는가? 이 비밀의 세계에 우리는 가난하다. 새벽에 자신의 몸에 핀 난을 찾기 위해 그들은 눈을 가만히 떴다가 감았다를 반복할 뿐이다. 자신의 몸에 난이 피었다가 진 자리에, 어떤 가해와 피해가 존재하는지를 묻는 일은 덧없다. 헤엄을 치고 온 여행자들의 하초는 갸륵해졌다.
새벽은 모든 대상들이 새로운 질서와 저항을 동시에 부과하는 시간이다. 새벽엔 인질범의 협상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현실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새벽엔 새로운 진실과 생명이 필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한없이 명랑하면서 조심스럽고 한없이 친밀하며 정교하며 횡설수설한 이 비밀의 공동체가 새벽에 무대 위에서 자작나무 아이 넷을 낳고 몸을 풀었다. 안개 속에서 그들의 발가락은 하얗게 얼었다. 그들의 몸에서 눈보라가 풀려나오면 관객은 하얗게 출렁였다. 관객은 여러 개의 계절을 지나며 환절기마다 목이 부었다. 비밀은 수치심을 버리는 순간 당신에게도 아름다움이 된다. 비밀이 모두 아름다운 수치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듯이, 이 비밀의 공동체는 마지막엔 먼 곳에서 오고 있는 기차의 선로에 귀를 대어보듯이 바닥의 숨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그들이 듣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글_ 김경주(시인, 극작가, 포에트리 슬램운동가)
사진_ SIDance 2014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