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창단된 이래 세련된 이미지 창출과 정형화되지 않은 신체언어, 뛰어난 공간 활용력을 지닌 단체로 인정받고 있는 호암아트홀 상주예술단체 안애순무용단의 첫 번째 신작 무대가 6월 10~12일 호암아트홀 무대에 올랐다. 이번 공연은 프랑스 안무가 파브리스 랑베르(Fabrice Lambert)와 그가 연출을 담당하고 있는, 렉스페리앙스 아르마와의 공동 프로젝트로 박소정 예술감독이 야심차게 기획한 공연이었다. 파브리스 랑베르는 예술가, 비디오 아티스트, 무용가와의 협동작업을 선호하여 많은 공연들을 창작해 왔는데, 38세의 나이에 비해 매우 관념적이고 직관(直觀)에 충실한 이번 공연을 통해 프랑스 특유의 세련되면서도 쿨(cool)한 색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작품의 시작은 1개월에 걸친 안무가와 무용수들 사이의 교감과 고찰, 집중적인 작업이었다고 전해진다. 파브리스는 무용수들에게서 개체가 지닌 감성을 끌어내고자 했고, 그들이 지닌 의식(儀式)이 작품에 반영됨으로서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 인류 모두의 기억으로 변환되기도 했다. 특히 인간은 축적되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 하에 기억에 대한 정의를 “층(layer)”이라는 컨셉과 연관시켜 춤언어로 표출하였다. 결국 안무의 컨셉으로서의 “층(layer)”은 기억에 대한 현재의 이미지를 몸으로 담아내며 또한 우리의 역사는 우리의 몸에 새겨져 있고 기억들로 구성되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현재의 인류는 과거의 층에서부터 출발해 축적된 퇴적층중 일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첫 번째 지층은 생명의 근원인 물로부터 출발한다. 무용수 개개인은 최초 미생물이 출현하던 때의 미생물일수도 있고 각자 의식(意識)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일상복을 입은 8명의 무용수들은 평범한 존재이며 상·하수를 관통하며 달려가다 상이한 동작으로 멈추는 과정을 통해 삶의 순간과 기억을 응집시켰다.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층을 형성하며 이후 강렬해진 몸짓은 외침과 고함이 뒤섞이며 큰 반향을 일으킨다. 또 다른 지층들은 인간 태초의 혹은 유희를 즐기던 시기를 의미했다. 그들의 춤은 어려운 테크닉을 사용해 시각적 자극을 주기보다는 관객들과 상호교감의 부분에서 많은 사고를 요했고, 표현력이 강조된 미니멀한 동작과 무대장치를 통해 집중시키는 효과를 의도적으로 연출했다.
여성성의 강조나 남성들의 역동성을 부각하기보다는 유기적 움직임들을 바탕으로 이합집산의 과정들은 층층을 이뤄가고 특수하게 마련된 무대바닥 위로 드라이아이스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와 천천히 녹아내리는 이 드라이아이스의 부피감은 가장 장관을 이루는 장면이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무리지어 헤쳐 다니며 이후 한 장소에 몸을 기대어 규칙적으로 팔을 젓는 행위는 공동의 의식을 향한 의지였다. 현재는 특별하고, 희망적이며 동시에 위험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과거에서 현재, 미래라는 층을 이루며 우리는 미래의 기억들을 지층처럼 견고하게 쌓아가고 있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로 상정했듯 파브리스는 시간과 공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인 신체를 중요매체로 삼아 인간의 역사를 춤이라는 제의적 의식으로 완성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기억과 의식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다루다보니 ‘현대무용은 어렵다’라는 일반적 고정관념에 빠지기 쉬었으나 파브리스와 렉스페리앙스 아르마, 안애순 무용단의 색깔이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가는 장면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글_ 장지원(무용평론가,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안애순무용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