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어터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연극인 유인촌이 운영하는 곳으로 한국의 비버리힐즈라고 하는 청담동에 위치한다. 운영자와 위치 때문에 그간 이 극장은 연극 중심의 공간으로, 또 전통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얼마 전부터 유시어터가 전통공연의 판을 펼치고 있다고 해서 알아보니 ‘2014년 악가무의 동행, 회향(回向)’이다. 9월 4일부터 10월 30일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이 공연은 전통 예인들의 춤과 소리가 중심이 되는 공연이다. 춤 프로그램은 궁중무용 정재(呈才), 민속춤, 신무용으로 고루 편성했는데, 정재연구회 회원들이 올리는 정재 프로그램이 두드러진다. 김경진의 춤(9월 11일), 송영인과 박수정의 춤(9월 25일), 안영숙과 이지연의 춤(10월 9일) 공연이 대표적이다.
정재연구회는 1996년에 ‘조선의 마지막 무동(舞童)’이라 불리던 고(故) 김천흥의 수제자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일무(佾舞)의 전수조교로 있는 김영숙이 창단한 단체로, 궁중무용 정재와 종묘 및 문묘(文廟)의 의식무인 일무를 연구하고 공연하는 곳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우리 사회의 관심이나 정부의 지원이 일간지에 잘나오는 공연, 일반 대다수 국민이 즐기는 공연을 우선시하다보니 다른 무용단에 비해 정재연구회가 공연단체로 자리 잡는데에 오랜 시일이 걸렸다. 무엇보다도 무용공연의 중심이 창작과 현대에 있다 보니 회원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교수 공채의 자격을 얻는데 필요해서, 학위 논문의 연구자료가 필요해서 단기간에 넘나드는 회원들은 많았지만, 그들은 정재와 의식무를 익혀야 하는 오랜 시간을 인내하지 못했다. 유학(儒學)을 근간으로 하는 정재나 일무는 시(詩)에서 발흥해서 예(禮)로 세우고 악(樂, 춤과 음악)으로 이루는 예술이다(공자의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참조). 그러니 정재를 제대로 공연하려면 유학을 공부해야 하고, 예를 몸에 익혀야 하며, 악가무(樂歌舞) 일체에 밝아야 하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혁혁히 변모하는 것이 현대의 무대예술인데, ‘공자왈, 맹자왈’을 조아리며, 스승에게 예를 다하고, 고전문학과 전통음악까지 폭넓게 익혀야하니 젊은 무용가들은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김영숙 예술감독은 이런 악조건들을 극복해 가며 19년간 정재연구회를 키워왔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정재연구회의 진가(眞價)가 발휘되는 시대가 온 것 같다. 정부의 문화융성 시책에다가 인문학의 열풍까지 몰아치면서 공연 관객들의 관심이 고전과 전통에도 뻗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2014년 악가무의 동행, 회향(回向)’은 이런 시대적 동향을 반영한 것이며, 이 기획 공연에서 정재연구회 회원들이 쌓아온 인문학적 바탕과 춤의 저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정재연구회의 이름으로 ‘회향(回向)’의 문을 연 회원은 김경진이다.
정재연구회 부회장을 역임한 김경진은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심소 김천흥 무악예술보존회에서 사무국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9월 11일에 있었던 ‘김경진의 춤’에서 그는 <종묘제례일무> 중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의 희문-귀인 편과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의 소무-영관 편, <춘앵전(春鶯囀)> 완판, <무고(舞鼓)>, <무산향(舞山香)>, <처용무<處容舞)>를 올렸다. 이중 4명 이상이 추어야 하는 <종묘제례일무>, <무고>, <처용무>는 정재연구회 회원들의 찬조를 받았고, 김경진은 독무인 <춘앵전>과 <무산향>을 추었다.
200석 규모의 유시어터의 무대는 반듯한 평면 구조라서 정재와 의식무를 관람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무대가 어느 정도의 깊이를 갖추고 있어서 정재 공연을 안정적으로 보이게 했고, 무대 뒷쪽에 둘러친 병풍(김천흥 유품)과 무대 앞쪽에 놓인 화준(花罇)은 정재 공연의 분위기를 한껏 살아나게 했다.
정재는 춤을 추는 사람이 춤의 한자락한자락마다 그윽한 뜻을 펼쳐 보이고, 보는 사람은 춤의 창제(創製) 배경을 이해하고 무용수가 전하고자하는 움직임의 의미를 깨달아 갈 때 제 맛이 우러난다. 즉, 무용수와 관객이 의미를 공유함으로서 비로소 춤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날 관객들에게 정재가 지닌 의미를 깨우쳐준 것은 정재연구회 김영숙 예술감독의 해설이었다. ‘전통춤 해설의 달인’답게 김영숙 감독은 춤이 창제된 경위에서부터 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이날 공연된 정재와 의식무에 대해 쉽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김경진은 그의 고(古) 스승인 김천흥, 현(現) 스승인 김영숙이 오랜 연구 끝에 환원한 궁중무용 <춘앵전>과 <무산향>을 지극한 마음으로 스승들과 관객들에게 지어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재는 여전히 어렵고 무겁게 느껴진다. 관객들이 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정재의 뜻과 시간을 향유하기에 우리의 시간이 이미 너무 빨라졌거나 또 너무 지나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거대한 우주관을 향해 있는 정재, 자신의 몸을 소우주로 삼아 대우주와 소우주의 합일(合一)을 향해 춤추는 무용수, 이런 고차원적인 춤의 세계에 관객들이 몰입할 여지는 크지 않다. 우리 것이라고 해서,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마냥 좋아할 수는 없다. 정재의 대중화를 위한다면, 정재연구회가 앞으로 나갈 길은 스토리텔링형 공연이다. 정재와 연관된 색, 음, 장식, 신화적 인물, 동물 등을 이야기로 엮어 현대적 감각으로 공연하는 방법을 간구해보아야 할 것이다.
글_ 편집주간 최해리(무용인류학자,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옥상훈 제공
동영상_ 김경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