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영국의 ‘새들러스 웰스’ 극장에서 초연된 이래로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관객을 공연으로 이끄는 매튜 본의 저력이 돋보인 <백조의 호수>공연이 5월 12-30일 LG 아트센터 무대에 올려졌다. 초연과는 다른 모습으로 섬세함과 위트, 날카로운 풍자가 더해졌다고 회자(膾炙)되는 이번 공연은 세 번의 내한공연을 통해 한국 관객들을 매료시키며 친숙함을 더했던 매튜 본의 위상 덕에 장기공연에도 불구하고 관객들로 붐볐다. 필자는 노던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 출신의 베테랑 조나단 올리비에(백조 역)와 장기간 <백조의 호수>와 함께 해온 도미닉 노스(왕자 역)의 공연을 보았는데, 힘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백조와 유약한 왕자 역을 충실히 표현해낸 이들의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서곡과 그랑 파드되, 디베르티스망으로 기하학적 구도와 엄격한 형식을 갖춘 고전주의 발레를 탄생시킨 마리우스 프티파와 당시 발레음악으로서는 인정받지 못했던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만나 서정적이며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완성했다면 매튜 본은 음악이 지닌 영감은 완벽하게 살리면서 발레의 원형과 현대무용의 조화, 사교댄스나 볼룸댄스의 차용 등으로 컨템포러리 댄스의 흐름에 동참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댄스 시어터 혹은 댄스 뮤지컬이란 20세기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나 영국의 DV8 무용단의 피지컬 시어터와 동일선상으로 보여진다. 연극과 춤, 영화의 공존이 가능한 그들만의 세계에서 현재진행중인 ‘컨템포러리’라는 용어는 참으로 적합하다(피나 바우쉬의 타계로 더 이상 그녀의 안무를 볼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작품 내용은 이미 잘 알려져 있기에 프롤로그와 4막으로 구성된 장면에서 전체적인 인상을 다뤄 보자면, 침대장면으로 연출된 프롤로그와 엔딩은 왕자가 만들어낸 상상 속의 백조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탄생과 죽음의 대장정이다. 1막에서의 화려한 공식행사와 바(bar)에서의 다양한 춤들은 안무자의 춤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증명했고, 모노톤의 미니멀한 궁전은 공허한 왕자의 마음을 대신했다. 2막에서 자살하려고 찾아간 공원의 호수에서 왕자의 영혼의 동료이자 사랑의 대상이 되어버린 남성 백조의 듀엣과 수많은 남성 백조들의 거친 호흡과 움직임들은 아름답기보다는 처절함에 가깝다. 강하고 위협적인 백조의 모습과 현란한 구성은 발레의 기본인 아라베스크와 에티튜드 라인은 살리면서도 강한 현대춤의 특성을 첨가했다. 특히 4마리 백조의 춤은 빠른 잔발걸음과 리듬을 살리는 동작들로 안무가의 위트를 충분히 살렸다. 3막의 화려한 무도회 장면은 매력적인 여왕과 섹시하기까지 한 낯선 남자(백조의 또 다른 이면)의 듀엣, 검은 실루엣을 만들어내며 그림자와 어울린 왕자와 나쁜 남자의 전형인 백조의 듀엣 등이 심리묘사와 더불어 그려진다. 정신적인 충격으로 여왕과 그녀의 얼굴을 똑 닮은 간호사들, 위협적인 의사의 치료를 받으며 홀로 침실에 남겨진 왕자가 자신을 공격하는 백조들과 이를 막다가 공동의 죽음을 맞는 백조와 함께 평화를 찾는 4막은 작품의 백미이기도 하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에 나타나는 인물들과 백조의 처절한 몸짓은 살아있는 육체가 지니는 존재감을 가볍지 않게 다루고 있으며 백조들의 비상은 근육질 남성들의 대표적 영화 <300>이나 인기 드라마 <추노>에서 헐벗은(?) 남성들이 보여주는 탄탄한 근육과는 다르게 현실적이며 인간적이다. 마츠 에크의 <백조의 호수>에서 대머리 남성들의 백조가 한 원형을 이뤘다면 매튜 본의 백조 역시 새로운 탄생의 순간이다. 고고한 기품을 지닌 전형적인 여성 발레리나의 백조에서 전투적이기까지 하지만 삶의 현장에서 역동적으로 꿈틀대는 생명력을 지닌 남성들의 백조로 탈바꿈한 것이다. 유약하며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고 동성애적 코드까지 지닌 왕자와 그의 모든 갈망을 갖춘 백조 혹은 낯선 남자, 야누스적인 여왕과 사악하고 부도덕한 개인비서라는 캐릭터는 인간의 모든 성향을 함축하며 이를 날카롭게 파악해 현실 속의 환타지로 환생(幻生)시킨 것이다. 공연에서의 아쉬움은 조나단 올리비에의 연륜에 비례한 체력저하, 가끔씩 엿보이는 군무진들의 불일치, 15년의 세월에 다소 빛바랜 움직임의 연출 등이었지만 매튜 본의 뛰어난 심리묘사와 유머감각, 무용수들의 표현능력, 독자적인 춤언어의 개발은 이를 커버하기에 충분했다.
매튜 본이 천재라 불리는 이유는 신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뛰어난 음악성을 보였던 발란신의 계보를 잇는 음악 해석능력과 댄스 시어터(dance theater) 혹은 댄스 뮤지컬(dance musical)이라는 장르를 훌륭하게 정착시킨 독창성, 로렌스 올리비에 상과 토니상을 수상하며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재능, 2002년 창단한 ‘뉴 어드벤쳐스’를 통해 끝없는 창작열을 불태우는 도전정신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데델라>, <카 맨>, <호두까기 인형>, <가위손>, <메리 포핀스> 등 계속되는 성공작을 통해 성공신화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이미 무용계의 거목으로 뿌리내렸음은 기정사실이다. 앞으로도 매튜 본의 상상력은 3D 영화를 뛰어넘는 버라이어티로 우리에게 신체라는 아날로그를 통해 신세계를 소개할 것이다.
글_ 장지원(무용평론가,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LG 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