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컨템포러리 댄스를 표방하는 국립현대무용단이 현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국내 남성안무가 2인을 초청한 기획공연 ‘발화하는 몸’으로 관객들과 만났다. 11월 14~16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이제는 어느덧 중진 안무가로 자리 잡은 김성용와 노정식의 신작들로 구성된 ‘발화하는 몸’은 각각
하지만 “소리를 내어 말을 하다”라는 뜻의 발화라는 단어는 동시대 무용에서 몸이란 미적 대상이나 이동의 수단이 아닌 지금, 여기의 삶을 지속적으로 재발견하는 토대이며 이 사회와 역사에 대해 말하는 몸을 표현하기에 그 의미가 깊었다. 특히나 기존의 안무 방식에서의 몸이란 표현이나 재현의 도구였지만 이번 안무에서는 문화적·사회적 발언을 생산하는 주체로 다뤘다는 점에서 몸이라는 화두로 깊은 이해와 사고를 도모하는 발상 자체는 좋았다. 플라톤 이래 정신과 신체라는 이분법적 패러다임과 언어와 육체의 경계를 해체하며 넌버벌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으로서 언어보다 강력한 몸의 발화를 표현한다는 것은 충분히 멋진 작업이 아닐지. 두 안무가의 표현방식은 달랐다. 몸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김성용의 진중함과 노정식의 위트 있는 시선은 그들의 평소 안무작업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6개월간 리서치, 무용수 워크숍, 프로덕션 등의 과정을 거쳐 제작된 작품에서 풍겨지는 인상은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우선 김성용의
노정식의 <상처>는 김성룡에 비해 몸에 숨겨진 우리들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상처와 기억에 관해 때로는 위트 있게 때로는 과감하게 이야기했기에 관객들이 조금은 가까이 가기가 용이한 작품이었다. 그는 사회적, 역사적 상처들과 기억들이 어떻게 몸에 각인되었고, 그것이 어떠한 외피를 가지고 다시 환원되는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하며 “몸의 기억은 타자의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 의식의 표면으로 도망쳐 나온다”는 자신의 생각을 움직임으로 피력했다. 특히 안무자로서 그는 피해와 가해의 입장이 때때로 변하고 타자화 되는 관계성에 주목하는 동시에 어두운 현실의 이면을 역설적으로 ‘자연’이라는 치유의 존재로 희석시켰다. 초반부 두 남녀(윤보애, 김지민)이 보여주는 이성간의 상처는 움직임의 주도권이 이동하는 관계나 변화하는 상황제시를 통해 코믹한 터치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후 군무(김건중, 김호연, 도황주, 이전인, 최민선)의 강렬한 에너지는 타자의 시선과 개인이 만들어내는 몸의 역학에 대해 노정식이 던지는 직관적 질문에 대해 발화하고 있었다. 각 개인들의 상처는 또 다른 관계를 형성하고 우리가 하나의 사건 안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를 탐색하며 실험했다. 삼면을 둘러싼 미니멀한 흰 테두리 공간 속에 일렁이는 영상 이미지들은 무용수들의 변화하는 움직임들과 맞물리며 은폐된 공간 속의 상처를 강조하기도, 어루만지기도 했다. 개개인에 주목하게 하는 솔로와 컨택을 통해 상처를 인지하고 표현하는 그루핑은 육체적 혹은 정신적 상처를 어떻게 사회․역사․문화의 맥락에서 풀어내고자 하는지에 대한 안무자의 해답이었다. 이 작품 역시 주제나 움직임의 측면에서 편하게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들이 없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컨템포러리는 ‘동시대’라는 뜻인 관계로 컨템포러리 댄스는 춤으로 그 시대의 상징과 역사를 가장 많이 담아낸다. 몸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강력한 표현력에 주목할 때 그 몸을 사용해 발화하고자 하는 것들은 한정된 하나의 언어라기보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다양한 언어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호불호가 갈린다고 해서 그 춤의 성공과 실패를 섣불리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정신과 신체의 일원론적 입장에서 ‘지금, 여기에’를 표방하며 의식과 인식 그리고 세계를 체험된 신체에 복귀시키는 현상학의 놀라운 능력은 이처럼 오늘날의 이 현상을 설명하기에 두 안무자의 작업이 나름대로의 존재가치를 갖는다. 또한 국립현대무용단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무용예술가들이 작업 과정에서 필요한 사항들을 인적, 물적 자원과 시스템을 통해 다각적으로 지원하며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글_ 장지원(무용평론가,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국립현대무용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