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융복합 공연이 자주 무대에 보인다. 이러한 공연은 전혀 다른 뿌리를 갖고, DNA가 다른 문화 간의 결합이기에 또 다른 열림의 공간을 대중에게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런 융복합 실험의 배경은 무엇일까? 이는 낯익은 관습에 대한 자율적 반발에 바탕을 둘 것이고,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라 이에 의탁하여 새로움을 전해주고자 하는 창작 의지에서 비롯될 것이다.
무용에서도 최근 여러 장르와 통섭을 이루며 새로운 창조물을 양산하고 있다. 와이맵(YMAP)의 미디어 퍼포먼스 <마담 프리덤>(서울 cel스테이지, 2016.2.3.~6.)도 그러한 범주에서 논의될 작품이다. 이 작품은 <춤을 추며 산을 오르다>(2005)에 기초하여 미디어와 결합되었고, 시대를 거듭하며 조금씩 변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담 프리덤>은 앞부분 태평무의 정제한 몸짓, 영화 <자유부인>과 중첩되어 나오는 남녀의 춤 그리고 영상과 어우러진 춤꾼의 미니멀 동작 등이 하나의 서사구조 속에서 표현되어 나타난다. 특히 영화 <자유부인>의 재현과 홀로그램 등을 비롯한 무대 전방위로 사용되는 영상 등은 관객들에게 테크놀로지의 여러 기법을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여준다. 이러한 작품 속 테크놀로지의 기법은 시대마다 장소마다 새롭게 변화했고, 더욱 진화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 처음의 번뜩임과 새로움이 ‘지금 이곳 여기’에서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지게 한다. 우선 작품의 서사구조는 세 가지 이야기가 분절되어 전달된다. 그러다보니 제목 <마담 프리덤>에서 말하고자 하는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현실과 영상 속 주인공의 그 넘나듦에서 그런 모습이 비추어지는지 모르겠지만 뚜렷한 의식 구조가 없다보니 그 의미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갈증은 오히려 닫힌 공간 속에서 반복 복제되는 영상과 마지막 영상 속 오브제인 어항 속에 매몰된 듯 한 면모로 다가 서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미디어 퍼포먼스라는 장르로 미디어와 춤의 결합을 통해 완성된 작품이다. 이는 어느 것에 우선을 두기 보다는 여러 장치와 예술 정신이 결합되어 합을 이루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담 프리덤>은 화려한 미디어 영상에 초점이 맞추어지다 보니 ‘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영상이 먼저 눈을 자극하다 보니 관객의 지향은 그쪽으로 향하게 된 데 기인할 것이다. 이는 영상 속 ‘나’와 지금 여기 함께 하는 ‘내’가 어느 것이 ‘참 나’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주인공 ‘마담 프리덤’이 공간 속에서 보이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융복합은 이미 퓨전, 통섭, 콜라보레이션 등 조금씩 이름을 달리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문화를 이끄는 힘으로 나타났다. 이런 혼종은 자연스러운 결합 속에서도 물리적 정반합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이러한 장르적 충돌 속에서 항상 생경한 깨달음을 전달해 준 대표적인 예술가로 백남준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비디오 아트 속에서 다양한 장르의 결합을 보여주었고, 플럭서스(Fluxus)를 통해 사회의 혁신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의 예술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단순 볼거리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결집된 담론을 보여주며 혼종 속에서도 각각의 개성이 고스란히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점이다. 플럭서스에서 그가 중심이지만 요셉 보이스는 요셉 보이스의, 존 케이지는 존 케이지의, 머스 커닝햄은 머스 커닝햄의 모습이 분절되지만 그들의 개성이 뚜렷이 발현되어 보인 것은 그러한 예이다.
<마담 프리덤>도 각각의 기술은 최적화되어 있다. 시공간에 따라 변용되어 나타나는 여러 통합운영의 기술은 융복합 퍼포먼스의 정점을 보여준다. 이는 체계화와 전문화를 이룬 구성원에서 나타난 당연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미디어 내러티브에서 아날로그적 혹은 인간적 감동이나 느낌은 얻을 수 없는 것인지, 과학에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아쉬운 부분이다.
바이올린 연주 능력에도 출중하였던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에게 음악과 과학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느냐 물었더니 ‘예술과 고차원적 과학의 그 밑바탕에는 조화로움이 깔려있다’고 말하였다. 결국 융복합의 기초는 조화로움에 있을 것이다. 색의 조화가 이루어진 가지런한 형태가 여지없이 섞여지는 비빔밥이 그 혼돈의 질서 속에서 나름의 질서를 찾아가는 것도 조화로움과 각각의 재료의 살아있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글_ 김호연(문화평론가)
사진_ YMAP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