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의 전통 무대는 해외 유명 연출가들과 종종 협업을 해왔다. 한때 문화상호주의 열풍에 기대어 서양 연출가를 통해 뭔가 새로운 것이 발굴되리라는 은근한 기대를 품기도 했다. 이제 창극에 이어 무용도 새로움에 대한 열망을 자제하지 않는다. 전통춤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의지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국립무용단은 2014년 테로 사리넨에 이어 이번에 서양안무가와 두 번째 협업을 시도했고, 조세 몽탈보를 선택했다. 안무가이긴 하지만, 주로 춤보다 춤과 결합하는 무대요소에서 더 탁월함을 보여 온 그가 춤의 근본적 변형과 변모를 진전시키는 데 적합한 인물인지는 의문이다. 몽탈보의 성과들이 화려하긴 하나 그의 기발한 발상은 장면 연출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면 이번 공연이 남긴 비키니 차림의 여인과 도포를 입은 남자가 파라솔을 쓰고 동행하는 모습은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라는 대주제를 포착한 걸출한 장면이다.
그 밖에도 영상의 질감은 무대의 보조 요소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매혹적이어서 관객을 춤보다는 영상으로 유인한다. 영상 속의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동선연출도 인상적이다. 우리의 전통춤이 알 수 없는 시 공간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등장하는데, 영상 속 과거가 무대의 현재로 이어지는 연결은 과거의 것에서 오늘을 발견하겠다는 시도로서 춤의 타입슬립이었다. 인류애를 투영한 다큐멘터리적 영상 몇 장면은 다소 무게감을 주는 듯 했으나 작품이 가고 있는 방향에서 궤도를 이탈하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대가 영상에 압도되는 아슬아슬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몽탈보의 전작들에서 기대한 그런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기존의 작품 틀에 한국 전통춤만 끼워 넣었다는 혹자의 평에 공감하는데, 작품의 특징적 틀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 않다. 다만 그의 틀과 한국춤과의 미적 조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이 아쉬울 뿐이다.
춤의 변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1, 2부에서는 춤사위의 변화보다는 장르를 활용한 전통춤과 현대춤의 혼용이 특징적이다. 오고무, 장구춤, 소고춤, 부채춤을 새로운 맥락에 재배치했다고 볼 수 있다. 3부는 ‘볼레로’를 독창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도전이라고 했다. 한국춤과 음악을 재료로 기존의 볼레로춤을 변형시키는 시도다. 예상했듯 조화와 균형을 미덕으로 지녀온 전통 춤사위들이 서로 어긋나면서 분열하고 충돌한다. 기존의 미적 기준에 균열을 일으키는 어색함을 부인할 수 없다. 전통춤의 리듬과 해학성이 균열의 틈을 메우고자 노력했으나 그들의 도전이 이질성을 극복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몽탈보는 이번 작업을 “예술적 모험이자 인간적 모험”이라고 했는데, 그에겐 얼마나 신비로운 체험이었겠는가, ‘유럽인의 동방취미’라는 근대적 오리엔탈리즘의 단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창극무대에 아힘 프라이어가 다녀갔지만, 이론가들만 즐겁게 해주고 갔다.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도 성공이었다고 볼 수 없다. 정작 창극이 관객의 사랑을 폭발적으로 받은 것은 서재형, 고선웅과 같은 한국 연출가들에 의해서다. 외국의 대가들이 남기고 간 재료들을 발전의 원천으로 삼고자 하나 그러한 의도가 치르는 대가는 만만치 않다. 시각적인 혹은 심미적인 문화적 차이가 엉뚱한 희생을 유발하기도 한다. 실제로 무용이나 연극이나 외국의 연출가들이 한국 무대와 협업하여 좋은 성과를 얻는 경우는 드물다. 짧은 일정 등 제반 여건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그들이 한국에 와서 작업할 때 그들의 예술적 호기심의 추동력은 우리의 기대와 다를 수 있다. 그들이 평소 자신의 작업에서 생성하는 원천을 한국 무대에서 얼마나 끌어낼 수 있을까? 다만 이번 공연의 다행스러움은 춤을 없애거나 본질을 왜곡시키는 시도가 아닌 전통춤의 가치를 충분히 존중했다는 점이다.
글_ 서지영(공연평론가, 드라마투르기)
사진_ 국립무용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