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에 서울역사는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의 가장 힙하고 핫한 공간이었다. (유행을 타는 컨템포러리 댄스의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행어를 쓴 것이다) 한 세기가 지나고 서울역사는 낡고 닳아서 사적 제284호가 되었고, 2011년에 문화역서울 284이라는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현재 문화역서울 284은 한국 컨템포러리 예술의 가장 힙한 작가들을 초청하여 가장 핫한 공연으로 시즌 프로그램을 쿨하게 꾸리고 있다. 사적지가 한국 컨템포러리 예술의 최전선이 된 것이다.
가을 프로그램 ‘오픈스페이스’에서 가장 눈에 들어 온 작가그룹은 마프+롬이었다. 마프+롬은 안무가로 한정하기에는 너무나 재주가 많은 무용가 김슬기가 속해 있는 MAF와 ROM의 멤버들이 창의성을 실험할 때와 곳을 찾아 뭉치는 프로젝트 그룹이다. 지난 10월 7일과 8일, 문화역서울 284로 마프+롬의 멤버들이 모였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지하철 안과 밖의 풍경 그리고 관계들을 <9월.4호선>으로 그려냈다. 사랑과 자유 등 추억이 돋는 이야기들이 비닐 장막 뒤의 영상과 사진을 통해 어렴풋이 투영되는 것도, 문 밖으로부터 가슴에 가만히 손을 댄 채 홉핑하며 줄지어 들어오는 무용수들의 움직임들은 묘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켰다.
<9월.4호선>은 MAF와 ROM이 의기투합해 만든 전시와 공연이다. MAF는 작년 4월에 안무가 김슬기와 영상작가 WOODY ANSWER JR가 만든 – 그들의 표현을 빌린다면 – 아티스트 창작공장이다. 공장장 격인 김슬기가 안무를 맡고, WOODY ANSWER JR가 영상을 담당한다. 그리고 고광준이 음악으로, 송혜나, 오재우, 이광준이 미술작가로 참여한다. 김슬기의 무용원 동기 혹은 후배들인 김승록, 정윤정, 이선시, 손대민, 김영란, 이소윤이 때때로 무용수로 참여한다. MAF는 ART Project, Create, Archive, Performance, Collaboration, Community를 지향하는 그룹이다. 한마디로 이 그룹은 예술의 경계를 지우고 실험하는 다원예술단인 것이다. 그리고 ROM(Records of Movement)은 무대 밖의 무용을 영상, 사진, 음악과 융합하여 전시하는 – 그들의 표현을 빌린다면 - 공간(www.recordsofmovement.com)이다. 극장용 무용이 갖는 시공간의 한계성을 극장 밖에서, 또 영상을 통해서 극복하고 확장하겠다는 것이다. 이 그룹에서 김슬기는 움직임을 맡으며, 영상의 권철, 사진의 BAKI, 음악의 안준하가 협력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이 그룹의 예술적 지향점은 ‘장소특이성’에 있는 듯 장소섭외자(이다빈)의 이름을 제작진의 크레디트에 올라와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이와 같은 단체 소개를 언뜻 읽으면 MAF와 ROM이 컨템포러리 예술의 유행을 쫓는 그룹처럼 보일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9월.4호선>의 전시와 공연은, 오히려 그들이 한국 컨템포러리 댄스의 한 흐름을 창조해 간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만큼 <9월.4호선>의 공간은 안무가 김슬기를 비롯하여 참여 아티스트들의 진지함과 다재다능함으로 가득 찼고, 이들이 자아내는 분위기와 리듬은 색다른 감동을 주었다. 여기서 ‘색다른’이란 그들의 예술이 기존의 공연과는 결을 달리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은 ‘컨템포러리 댄스’를 애써 표방하던 기성 안무가들의 공연보다 한결 컨템포러리 예술다웠고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감동’은 이들의 전시와 공연에서 한국 컨템포러리 댄스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것과도 같은 전율 때문이었다.
천정과 벽면의 페인트칠이 덤성덤성 벗겨진 문화역서울의 공간을 아련한 추억과 기억의 공간으로 만든 착상, 문화역서울의 육중한 과거의 문을 열어 제친 후 관객들로 하여금 현재의 거리와 중첩시켜 보게 만든 발상, 그리고 경쾌한 록 음악에 마치 기차가 덜컹 거리듯 리듬을 맞추어 가던 김슬기와 무용수들의 몽환적 움직임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서울역사가 주는 노스탤지어를 오늘날의 지하철 이야기로 환치해서 움직임, 영상, 사진, 음악으로 오버랩시켰던 마프+롬의 작업은 아그네스 발차의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를 들은 듯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들의 창작정신이 오래 살아남기를 바라며...
글_ 편집주간 최해리(무용인류학자,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문화역서울 284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