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포스트코리아
지난자료보기

로고

무용리뷰

공연비평

<그 사람 쿠쉬 - 천년의 사랑 ‘쿠쉬나메’>에서 보는 무용과 연극의 거리



 가까우면서도 먼 것이 무용과 연극의 거리다. 알랭의 분류에 따르면 무용과 연극은 조각 공예 등 고독한 예술과 구별되는 사회적 예술로 분류되지만 무용이 근육을 사용하는 촉각적 예술임에 비해 연극은 시각과 청각에 의존한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심층을 감동시키기 때문에 음악과 무용을 최고의 예술로 분류했다. 이런 면에서 무용은 연극보다 오히려 음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은 문자를, 음악은 소리를, 그림은 색채와 선을, 연극은 대사를 표현수단으로 하여 분화된 예술의 장르들이다. 이들과 차별화된 무용의 언어는 몸이다. 손끝과 발끝의 움직임, 시선과 표정의 미세한 변화, 몸의 굴신과 발걸음들이 모두 무용언어의 알파벳이다. 연극이 대사 전달효과를 높이기 위해 춤을 사용하는 것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무용이 연극화되는 것은 예술자체의 특성을 흐리게 하고 무용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는 위험을 수반할 것이다.


 최지연무브먼트의 <그 사람 쿠쉬 - 천년의 사랑 ‘쿠쉬나메’>(12.3~4, 국립극장 KB청소년하늘극장)는 무용서사극을 표방한다. 이희수 원작에 최해리가 제작감독을, 최지연이 안무를, 서지영이 드라마트루기를 맡았다. 출연진으로는 최지연, 김현선, 김여진 등 무용가와 함께 이창수, 박무영 등 연기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연기자인 손병호는 해설자겸 내레이터로 작품의 전편을 누빈다. 전투와 살육, 항해 등 극적 스토리전개를 위해 영상이 사용되고 무대 좌우에 설치된 스크린에선 장면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중계한다. 이희수 교수가 발굴한 페르시아와 신라간의 교류란 학술적 자료를 소개하기 위해 손병호를 주역으로 하는 연극형식을 택했고 몇 군데 이벤트성 장면을 강조하기 위해 춤이 구색을 맞춰주었다는 것이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이다.




 형식면을 떠나서 볼 때 <쿠쉬나메>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로, 춤 소재의 특이성이다. 심청과 춘향 등 제한된 소재에 주로 의존해왔던 무용극의 소재가 이슬람으로 확대된 것이다. 고려 때 쓰인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와 이슬람간의 문화교류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두 지역 간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고 해상과 실크로드를 통해 활발한 교역이 계속되었으며 경주 신라 왕릉에서 출토된 유리제품들이 이슬람에서 유입되었다는 사실들이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처용설화가 동해에 출현한 외래인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고 중세 아랍인들의 기록에는 아틀란티스대륙과 동방의 신라를 2개의 이상향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기독교문화와 이슬람문화간의 대립으로 인해 이러한 사실들이 주류역사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쿠쉬나메는 새로운 예술적 소재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최지연이 안무한 춤의 수월성이다. 제한적 역할에 머물기는 했지만 이 작품에는 몇 개의 인상적인 춤이 있다. 페르시아왕자와 신라공주의 감미로운 듀엣(이창수, 김현선), 사랑하는 딸 프라랑 공주를 이역만리 페르시아로 떠나보내야 하는 비탄을 담은 왕비(최지연)의 솔로와 자매들이 추는 이별의 5인무, 산고의 고통을 보여주는 3인무와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군무 등이다. 순수한 무용공연으로 작품이 완성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서양음악과 거문고, 해금, 피리 등 국악기를 골고루 사용한 음악(김한솔)은 다양성이 있었다. 그러나 본래 마당놀이전용으로 설계된 청소년하늘극장의 개방적 좌석배치로 인해 음향과 조명 등 무대의 시청각요소는 불완전했다. 의상 역시 신라와 이슬람의 중간에서 선택한 애매한 디자인이 단조로웠고 모래예술기법을 사용한 영상은 저비용으로 다이나믹한 스토리텔링을 가능케 한 인상적인 시도였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사람 쿠쉬 - 천년의 사랑 ‘쿠쉬나메’>로 명명된 제목이다. 쿠쉬나메는 쿠쉬의 이야기 혹은 쿠쉬전(傳)으로 번역된다. 작품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폭군 쿠쉬에 패배하여 신라로 입국한 아비틴과 신라공주 프라랑의 감미로운 사랑,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간 그들의 죽음과 아들인 페라둔이 각고의 전쟁 끝에 승리하여 페르시아의 영웅으로 탄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제목과는 괴리가 있는 내용이다. 제목이 실질을 반영하지 못할 때 작품의 리얼리티는 흐려진다. 제목이 왜 쿠쉬전일까. 페라둔이 승리한 후에도 왜 모국인 신라이야기가 페르시아의 역사에서 사라진 것일까. 원작자에게 그리고 작품을 만든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글_ 이근수(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사진_ 최윤석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