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복합, 다원, 이런 말들이 예술가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굳이 이러한 장르를 구분하여 명명하지 않더라도 현대 예술은 이미 형식과 재료의 관습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장르 간의 경계도 허물어진지 오래인데도 말이다. 무한한 상상력을 가로막을 울타리는 없다. 융·복합은 이제 상식이며 예술은 이미 다원적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장르가 특별히 환심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개 이상의 장르 그리고 상이한 차원들이 만나 소통과 불통의 상황이 발현되는 복합 예술의 기능은 예술로서의 가치보다도 회복 불가능한 장르별 자생력을 치유해 보려는 시도인지도 모른다. 동시대 예술이 창작보다는 구성으로, 진행보다는 발생으로 이해되면서 그 어떤 예술도 시간과 공간을 일치시켜 규정하기는 어려워졌다. 여러 장르의 충돌과 조화에서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익명적인 힘이야말로 예술가들에게 등불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인식의 확장이라는 그럴듯한 해석에 기대어 독자적 위상의 위기를 극복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러한 장르의 전문가는 따로 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기획된 다원 또는 융복합예술은 이론이 70%이고 나머지 30%의 기능적인 부분을 예술가들이 채운다. 새로움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우선 중요하고, 묵직한 해설의 무게로 종이 장처럼 나풀대는 작품을 날아가지 않게 붙잡아 준다. 종종 성과도 낸다. 그러나 대다수는 그저 다른 장르와 만나는 것에만 비중을 두고 에너지와 경비를 쏟아 붓고 있다. 설사 그 대가가 아주 허망하더라도 예술가들은 이런 장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음·형:공간 音·形:空間>(2016년 11월 23~24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창작산실에서 복합장르 분야로 선정된 작품으로 이 역시 색다른 자극에 회동한 공연이랄 수 있다. 영화와 춤의 콜라보를 콘셉으로, 그 동안 공간으로서 춤을 사색해 온 안무가 박소정이 몸에 대해 새로운 성찰을 시도한다. 움직임보다는 움직임으로부터 파생된 언어와 그들의 새로운 조합에 집중한다.
무대에는 사각형의 영사막이 설치되어 있고, 전통적인 영화관의 형태로 영상을 상영했다. 영상 속에서 ‘하이쿠’ 시구를 육화시키고자 애쓰는 무용수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대화와 솔직한 고민들이 아름다운 흑백 영상에 실린다. 무대에는 영상을 보고 있는 무용수들이 영상에서 재현된 움직임을 무대에서 동시에 보여주면서 잠시나마 재현된 몸과 현존의 몸이 공존하는 순간도 맛볼 수 있다.
영상과 무대가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그 어떤 것도 우위랄 수 없지만, 무대 위의 절제된 춤은 영상의 잔영을 이어가지 못해 아쉬웠다. 정적인 가운데도 역동성이 넘쳤던 박소정의 춤을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공연은 무용공연은 아닌 것이다. 무용수가 만든 공연은 반드시 춤을 열심히 춰야 한다고 여전히 필자도 관객도 어리석은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욕심은 접는다고 치자. 그럼에도 공연의 의도를 애써 관객에게 설명하려던 시도는 강압적으로 느껴졌다.
움직임이 남긴 여운, 이미 지나간 것의 형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규정하고자 하는 의도는 움직임을 지각하는 또 다른 차원의 요구로서 춤이라는 예술에 대한 성찰의 확장이며 창작자의 삶을 선회하는 과정일 수 있다. 이 과정을 공굴리기로서 표현했는데 육성으로 그 의미를 해설했고, 관객은 그때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공연의 지시대로 행해야 하는 순례길에 올랐다.
관객은 그저 이미지를 통해 심미적으로 각인된 것들을 각자의 정서와 미적 판단에 의해 정리한다. 관객의 미적 여운을 존중해 주었더라면 오히려 연출의 의지가 자연스럽게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와 춤의 콜라보라는 취지는 과연 이 공연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콜라보의 의미를 되짚어 보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콜라보는 공동작업ㆍ협력ㆍ합작을 뜻하는데, 분야의 경계를 뛰어넘는 협력으로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복수의 예술가가 동일한 작품을 대등하게 분담 제작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반된 성격의 요소가 협력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전략으로서 유용하다. 그러나 그 어원에는 나치에 협력한 자를 의미하는 ‘협력자’(collaborateur)와 그것의 경멸적인 약칭인 ‘콜라보’(collabo)란 용어가 숨어있다. 즉 콜라보는 적에 대한 협조를 의미했다. 예술의 콜라보가 외면적 융합이 아닌 내면적인 결합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말의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금 적에게 협조하는 차원에 머물지도 모른다.
글_ 서지영(공연평론가, 드라마투르기)
사진_ 옥상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