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전시공간이라고 규정했던 곳에서 이제 다양한 형태의 공연을 보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극장에서의 공연을 압축해서 전시하거나 아니면 시간을 늘려 장시간의 퍼포밍을 시도하는 등 공간을 의식한 작업 외에도, 많은 전시에서 부지불식중 공연성을 만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그와 반대로 전시 경험을 극장 무대로 옮기는 경우도 더러 있다. 지난 1월 20일부터 22일까지 베를린 HAU(Hebbel am Ufer)에서 공연된 블라카 호르바트의 <소행성>은 작가의 설치 작업이 극장 공연으로 전환된 것인데 개인의 경험을 이전하고 공간과 시간을 재배치한 그녀의 기술과 미학의 전환 방식이 흥미로웠다.
먼저 우리에게 낯선 작가인 블라카 호르바트에 대해 소개하면, 조각, 설치, 드로잉, 디자인, 사진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전시와 퍼포밍을 시도해 온 예술가다. 박물관, 극장, 공공장소 등 공간에 제약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작업을 다원예술 또는 복합장르로 구분하겠지만 독일에서는 굳이 그렇게 분류하지 않는다. 어떤 예술가든 자신의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작업을 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각각의 출발점이 다를 뿐인데, 중요한 것은 장르나 공간이 아니라 작가의 개별적인 정의(definition)일 것이다. <소행성>은 탄츠(춤) 공연으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여기 참여한 퍼포머들이 무용수 출신이고 이들의 동작 안무가 공연을 이끄는 중심이기 때문이다.
극장 무대에서 공연을 올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활용했던 소재와 오브제를 극장의 무대와 제한된 공연시간에 맞춰 새롭게 구성했다. 이 공연은 전시와 공연간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지만 작가 개인에게도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새로운 형식으로 옮기는 실험이기에 작업의 분기점으로서의 가치가 클 것이다.
그녀의 모든 작업의 주안점은 스스로 밝혔듯이 육체와 사물과 공간 사이의 관계를 사회적, 신체적 맥락에서 탐구하는 것이다. 신체를 분리시키고 새롭게 조합하면서 섬세히 탐닉하는 작업이 현저히 눈에 띤다. 특히 오브제로 일상용품이나 폐기물을 자주 활용했는데, 이 공연의 중심 오브제는 재활용 폐기물들이다. 이들을 퍼포머의 몸과 유연하게 연결시켜 꼼꼼하게 설계된 텍스트를 바탕으로 기존의 고정된 배치에 시간성을 부여했다.
무대 양쪽 가장자리에 나무, 종이, 플라스틱, 헝겊 등 다양한 재료의 폐기물들이 널려있다. 다섯 명의 퍼포머가 등장하여 이들을 하나씩 들고 나와 몸동작과 연결한 퍼포밍을 한다. 의자, 밧줄, 줄자 등 일상용품들을 바닥에 깔거나 머리에 두르는 등 갖가지 움직임을 만들어 내며 오브제와 자신의 관계를 만들어 낸다. 그들은 서로의 동작을 살피며 상대방과 경쟁적으로 행동한다. 이때 오브제를 활용하여 일정 거리를 질주하게 되는데 치열하게 새로운 동작을 개발한다. 1회의 질주 후엔 오브제를 바꿔 다시 출발한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누가 더 기발하게 도구를 이용하여 빠른 속도로 질주하느냐가 관건이다. 옆 사람을 따라 하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좀 더 기발한 아이디어로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려 애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자신만의 방식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해진 경로와 규칙 안에서만 자유롭다. 따라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의 몸부림이 웃음을 유발한다. 억지스럽지 않게 연출된 희극적 장면과 그와 대비되는 처절한 몸놀림은 관객의 가슴을 시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 공연은 <소행성>이라는 제목이 알려주듯 비주류의 삶을 다루고 있다. 어떻게든 발버둥치고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 경쟁을 보여준다. 오브제와 신체로 펼쳐 놓은 인간의 심리는 복잡한 듯 하면서도 단순하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크고 작은 희망과 좌절의 사건을 오브제만을 활용하여 단순하면서도 치밀하게 삶에 대한 은유의 퍼포밍으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그녀의 전시작품에서 압축되었던 파일을 무대에 풀어 놓은 것이다. 그녀의 작업은 서사를 함축하고 작가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새로운 개념예술과는 차별성을 갖는다.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 역시 감각의 움직임보다는 서사에 의한 인식이다. 작가의 콘셉이 빈파일로 제시되지 않고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이야기로 잘 짜여 져 있다. 따라서 이 공연만을 보면 동작은 재미있으나 반복과 응용이 길어서 다소 지루하기도 하고, 주제가 너무 확연히 드러나는 바람에 익히 다루어온 이야기를 왜 새삼스럽게 이토록 공을 들여 보여주려 하나 의문도 생긴다. 그러나 두 가지 관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는데, 하나는 신체와 사물의 관계 형성을 촘촘하고 탄탄한 서사로 연결해 낸 구축 방식이 서사기술의 새로운 방식으로서 주목 할만 했고, 또 하나는 이 공연이 올라간 페스티벌의 기획 취지와 연결해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공연된 베를린의 HAU(Hebbel am Ufer)는 지난 1월 12일부터 22일까지 HKW(세계문화의 집)와 공동 기획으로 러시아 혁명 100주년 기념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것 이상으로 그 시대에 품었던 인류의 이상을 현재화시켜 변혁의 시기에 예술이 정치와 함께 도약했던 혁신의 에너지를 되살리자는 의지가 컸다. 연극, 무용, 전시, 음악, 퍼포먼스가 다채롭게 진행되었는데 러시아 혁명에 대해 직접 다루지는 않았으나 HKW(세계문화의 집)이 4년간 준비한 프로젝트를 토대로 이들이 과거로부터 소환하여 재조명하려는 것은 ‘유토피아’와 ‘페미니즘’이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러시아의 붉은 장미로 불리는 노동 운동가이자 여성해방운동가)의 정신을 부각시켰다. “러시아 혁명과 페미니즘은 육체, 사랑 그리고 성을 정치적 테마로 만들었고 가족 정책과 교육 정책의 새로운 모델로 발전시켰음을 상기시키고자 했다.
100년 전 유토피아는 어떤 의미였으며 그 시대의 이상이 오늘날 그리고 미래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을 것인지를 질문해 보며, 역사적 사건을 돌아보는 일이 늘 그렇듯이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통해 동시대 사회가 제 위치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블라카 호르바트의 참여는 그녀의 삶과 관련된다. 1974년 크로와티아(구 유고슬라비아) 출생으로 20세 이후에는 런던에서 공부하고 활동했으나 1990년 모국인 유고슬라비아의 붕괴 상황을 직접 목도했고, 한 체제의 붕괴와 개혁을 지켜보며 변혁기의 사회상을 뼛속 깊이 체험했다. 그녀는 유고슬라비아 몰락 후의 혼란과 그 시기에 만연했던 기회주의를 이 작품의 제재로 다루었다고 밝혔는데, 지속되어 온 구조가 붕괴된 후, 불확실한 세상에서 벌어진 혼란의 상황을 회상했다. 그녀의 기억은 동시대의 불안한 정치 상황과도 다르지 않다.
난민과 테러 문제로 시달리고 있는 유럽에서는 예술계도 역시 이 같은 상황을 직시하는 기획물들을 지속적으로 만들고 있다. 베를린의 무대와 전시장에 즐비한 ‘전쟁’ 관련 테마는 20세기 초반을 회고하는 이번 페스티벌의 취지와 폭넓게 교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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