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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인가, 관념인가 - 웨인 맥그리거의 〈아토모스〉


 3D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다? 웨인 맥그리거의 <아토모스>는 공연의 3분에 1을 3D 안경을 착용하고 관람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3D에 비해 입체감의 환영이 약하다. 왜일까? 모디터가 일곱 개로 분산되어 있고, 각각의 모디터에서 돌출된 이미지들은 눈앞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모니터 안에서 뒤로 깊숙이 멀어지기도 한다. 공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라는데, 어쨌든 기대와는 다른 이미지의 이동을 쫓다 보면 관객이 3D 영상의 착시 환상에 빨려 들어가 황홀함을 느끼는 순간은 짧다. 모니터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공연 제목과 직접 관련이 있는 원자 모형도 있고, 재난 영화의 장면도 있다. 공연 초반에 무대의 아름다움에 몰입되었던 관객은 이 시점부터 오히려 깨어나 은연중 감상 방식을 바꾸게 된다. 3D 모니터의 역할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조명이나 음악과 어우러져 관객의 감각을 새롭게 깨워 보려던 애초의 의도는 감각보다 궁금증을 먼저 자극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웨인 맥그리거는 지금까지의 3D와는 다른 차원의 작업이라며 관객이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고 했다. 관객의 감각 활동을 중시한 그의 공연에서 3D는 시각적 환영으로서 기능하기보다는 공감각적 경험을 유도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미지의 의미나 춤과의 연관성 등 작품에서 내러티브의 연결성을 궁금해하는 질문에 대해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말고 느끼는 대로 감상하라”고 답변한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이 흔히 말하듯 민주적인 관람을 요구했다. 평론가들의 자유로운 곡해에 대해서는 은근히 거부반응을 보였는데, 이는 특정 해석이 주입되어 관객의 자유로운 관람을 방해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아토모스>의 3D기법에 집중한 이유는 맥그리거의 전작들과의 변별점이자 이번 공연의 외연적 포인트로 부각되어서이다. 그밖에 <아토모스>에서는 무용수들의 생체 정보를 반영하여 가상의 몸을 만들어 훈련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의상을 제작했다고 한다. 저마다 다른 의상을 입고 등장하지만, 객석에서는 상세히 구분하긴 어려웠다. 그의 실험은 춤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어렵게 감지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이 공연의 제목 ‘원자’는 무엇인가. 모든 장르를 과학을 매개로 실험하고 있는 맥그리거는 춤만이 아니라 움직임의 근원을 탐구해 왔는데, 그의 탐구는 <아토모스>에서 ‘원자’라는 미세한 입자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맥그리거의 작업 특성은 이미 수많은 지면에 소개되었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1세기 초반, 한 층 업그레이드된 미디어 기술과 공연이 만나는 시점에 안무가 맥그리거는 과학과 예술의 결합으로 적절한 성과를 낸 대표적인 사례들을 남긴다. 가상현실이나 인터넷 접속을 통해 공간을 뛰어넘는 실험들은 당시에 새롭고 놀라웠다. 그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움직임을 탐구하고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무대 미학을 구축했다. 타 장르 예술가와의 협업을 바탕으로 무대 요소를 총체적으로 결합하여 감각적인 장면을 만들어냈고, 청각과 시각적 디자인을 무대 위의 몸과 적절히 조합시키는 기술이 주목할 만했다. 과학 기술을 활용하는 여타의 예술가들과 현저히 다른 점은 그의 실험은 결코 피상적인 설정이 아닌 과학에 대한 천부적인 관심과 탁월한 협업 기술이 제대로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발레 기술을 결합한 그의 춤은 유연한 움직임으로 한 폭의 그림, 아니 한 편의 시를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름다운 곡선으로 꺾임 없이 단절 없이 이어진다. 첨단 과학을 활용하지만 전통적인 무대요소를 기반으로 하며 지극히 관습적인 범주 안에 머물러 있어서 대중의 취향과도 멀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가 종횡무진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것도 그의 실험이 민낯을 드러내기 보다는 잘 다듬어진 결과물로 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안무는 육체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이며 협업은 “변화된 인지의 과정”이라는 신념으로 뇌과학에도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그의 사고가 과학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이라는 의심도 버릴 수 없다. 기술과 춤이 다소 분리된 듯한 <아토모스>는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서정적인 분위기면서도 테크놀로지의 차가움이 이를 단절시켜 냉기와 온기가 공존하고 교차하는 매력을 발산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산의 효과가 의도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가 동원한 테크놀러지는 춤에 대한 집중을 방해했을 뿐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지는 못했다. 평소 그의 지향점과는 다르게 관객의 생각에 변화를 느낄만한 순간은 오지 않았다. 과학기술과 예술이 만날때, 과학적 탐구의 과정은 자유로울 수 있으나 기술의 실천이 설득력이 없다면, 관념적 허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발레와 결합하여 더 빛을 발하는 그의 안무에 대해서는 지금 이 시점에 힙하고 핫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한지도 의문이다. 이제 그의 성과보다는 실험의 과정에 주목하여 탐구 방식과 협업의 양상을 탐색해볼 일이다. 움직임에 대한 지속적 연구, 컨탬퍼러리 작업의 교본과도 같은 그의 작업 과정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 같다. 그의 실험들이 또 다른 작품에서 창조적인 표현으로 계속 등장해 주길 기대해 볼 뿐이다.


글_ 서지영(공연평론가, 드라마투르기)
사진_ LG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