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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이 아닌 신체로서의 여성의 몸 - 아트프로젝트보라 〈소무〉

 “저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휴머니스트예요” 같은 언설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페미니즘은 낡았고 페미니스트들은 그 낡은 것을 추앙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이들이라는 인식 위에서, 항상 날이 서 있고 그 때문에 갈등을 유발하는 자들인 페미니스트에 비해 휴머니스트는 갈등을 봉합하고 남과 여를 아우르는 포용적인 존재들로 여겨졌다. “저는 휴머니스트예요”라는 선언은 그래서 “아직도 페미니즘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어?”라거나 “누가 요즘 페미니즘 이야기를 해?”라는 식으로 발화되는 페미니즘이라는 낡은 불화와의 결별을 의미했다. 이 선언은 여성이라는 주제를 작고 시시콜콜하고 신변잡기적인 시시한 것으로 치부하던 과거의 여성혐오와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었다. 휴머니즘은 페미니즘을 지나간 유행으로 치부하고 여성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여성혐오였다. 그러니까 휴머니즘이란 진보를 지향하는 자들이 갖춰야 할 새롭고 혁신적인 태도, 그리고 휴머니스트들은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무용작품을 만드는 창작자들이 ‘여성’이라는 주제를 대하는 시각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체의 움직임을 전시한다는 점에서 무용가들은 스스로를 대상화․타자화 하는 운명에 놓여 있는 이들이다. 무용가들은 때로는 아름다운 몸을 더욱 아름답게 보여주는 것으로, 때로는 몸의 아름다움을 애써 지우고 추함을 덧씌우는 것으로 이중의 타자화를 시도하는데, 이때도 여성의 신체 또는 여성의 신체를 통해 구현해내는 여성성이란 것은 가장 먼저 부정되거나 폄훼되는 그 무엇이었다.

 전통적인 성별 이분법에서 파생되는 고정관념은 무용 분야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아서, 아니, 무용은 오랫동안 정신적이고 이성적이고 안정적인 영역, 그래서 남성의 그것으로 간주되는 세계와 달리 신체적이고 감정적이고 불안정한 속성을 갖고 있기에 여성의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여성적인’ 예술로 간주되는 무용에서 (가령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보여주듯 무용을 하는 남자에 대해서는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고정관념은 현대에서도 매우 강고한 것으로 남아 있다) 여성적인 신체의 아름다움은 극복해야 할 어떤 것이거나 반대로 아름다운 신체로만 존재해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소무>는 무용계에서 그동안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여성의 신체를 작품의 중심에 놓았다. <소무>는 2015년 창작산실 무용 부문 우수작으로 선정되어 초연된 뒤 올해 모다페 무대에 초청되었고, 다시 창작산실 올해의 레퍼토리로 기존의 45분 공연을 60분으로 확대해 지난 7월 7~16일까지 청계천 CKL스테이지에서 재공연 되었다. 한두 차례 공연되고 내려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대무용 공연으로는 이례적으로 6회의 장기공연으로 진행되었는데, 6회 공연이 주말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흥행 면에서도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제목의 ‘소무’는 안무가의 전작이 <각시>였던 것을 감안하면 각시탈에 이어 소무탈에서 가져온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지만 작품 내에서 소무탈과의 관련성은 그리 드러나지 않는다. (소무는 탈춤이 추어지는 지역마다 다양한 버전이 있지만 대개 취발이 영감의 정부로 등장하는데, 주체가 아닌 ‘비체’로서의 여성을 말하기 위해 소무라는 캐릭터를 데려왔다고 보기에는 연결고리가 약하다.) <혼잣말>에서는 관객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소변을 보는 것으로, <각시>에서는 한복의 고쟁이를 연상케 하는 의상을 입고 얼굴을 가린 채 춤을 춤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 속 혹은 상징으로서의 여성성을 지워냈던 김보라는 <소무>에 와서는 여성의 몸 그 자체에 집중한다.

 동굴처럼 꾸며진 어두운 무대는 수조처럼 바닥에 물이 차 있고, 무용수들은 현대무용 공연에서 기대하기 마련인 점프나 회전 같은 테크닉 없이 종종걸음으로 무대 위를 가로지른다. 무용수들의 몸에는 낚싯줄 같은 줄이 친친 감겨 있으며 무용수들은 분절적인 움직임으로 허리를 굽히거나 머리를 조아리고,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기도 한다. 물이 차 있는 동굴 같은 무대는 양수 속에 태아를 품은 여체에 대한 비유로도 볼 수 있으며, 무용수들의 몸을 묶고 있는 줄은 여성의 몸을 악기에 비유해 남성에 의해 연주될 때에야 소리를 내는 여성의 수동성에 대한 상징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인사하는 무용수들의 모습에서는 백화점에서, 혹은 주차장에서 정해진 동작으로 고객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서비스업의 여성 종사자들의 현실과 겹쳐진다. 그러나 남성 무용수의 역할이 제한적인 <소무>에서, 여성 무용수들은 누가 연주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소리를 내며, 인사를 응용한 듯한 안무 역시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향한 응대라는 의미를 탈각시킨다.

 그동안 여성의 몸은 인간의 몸이기보다는 보지나 자궁 같은 생식기로 곧잘 이해되어 왔는데, 이러한 그릇된 이해는 여성의 몸을 여성으로부터 소외시켜 여성 스스로도 자신의 몸을 아이를 낳거나 혹은 남성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도구로 인식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김보라의 말처럼, 여성의 몸은 그저 ‘몸’일 뿐이다. 김보라의 여성과 여성의 몸에 대한 탐구는 <소무> 이후에는 어떻게 나타날까. 그 한 걸음은 일단 여성의 몸을 몸으로 받아들인 뒤에야 떼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_ 아트프로젝트보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