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좋아하는 사람은 객석에 앉고 춤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대에 선다. 무대에 선 춤꾼들 중에서도 진정으로 춤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타가 인정하는 춤꾼 ‘예술가 김선미’라는 호칭을 받는 것이 마지막 목표”라고 말하는 김선미는 분명 그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가 페르샤의 전설, 쿠쉬나메를 소재로 한 신작을 발표했다(12.21, 아르코 대극장). 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하는 ‘2014 무용창작산실 지원사업’에 선정된 대극장부문 우수작품 넷 중 하나인 <천(千>이다. ‘Love through a thousand years (천년을 통한 사랑)’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페르시아로 떠나간 신라공주의 애달픈 사연이 담겨진 천 년의 전설을 현실로 불러온 특이한 소재로 60분 공연시간 내내 나를 떨리게 한 작품이었다.
아랍과의 전쟁에서 패한 페르시아왕자는 결국 신라에까지 밀려온 후 왕궁에 머물면서 재기를 기다린다. 신라공주와 사랑에 빠진 그는 왕에게 간청하여 공주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부왕의 뜻에 따라 달갑지 않은 결혼을 한 공주는 페르시아로 돌아가는 왕자를 따라 기약 없는 먼 길을 떠나간다. 그가 낳은 아들이 페르시아를 구해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지만 공주는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 땅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녀의 외로운 혼을 천년 후의 현실로 불러내고 공주는 또 아버지 왕을 불러내어 천년 만에 부녀간의 슬픈 해후가 이루어진다. 그녀를 현실로 불러내어 부왕과의 해후를 가능케 한 만신 역은 김선미가 맡았고 비운의 공주는 최지연의 몫이다. 붉은 장삼을 입은 만신이 안개 자욱한 어둠 속에서 공주를 불러내 마주 선다. 전설 속 장면과 현실이 뒤섞이며 춤이 피어난다.
작품은 2분법적 구도로 전개된다. 스토리를 구성하는 두 개의 기둥이 전쟁과 사랑이고. 천년의 시간을 달리한 과거와 현재, 만신의 부름에 의해서 넘나드는 이승과 저승이 그러한 구도를 형성한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서는 2인무가 특히 강조된다. 첫 번째 춤은 김선미와 최지연의 솔로 대결이다. 김선미의 춤은 빠르고 직선적이며 힘이 넘치는 반면 최지연의 춤은 대조적으로 느리고 곡선이고 부드럽다. 창무회의 대표적 춤꾼이기도 한 김선미와 최지연의 듀엣은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역동성과 서정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느낌이다. 페르시아왕자와 공주의 듀엣은 왕자의 적극적인 구애와 공주의 소극적인 반응이 대비되면서 힘겹게 결혼을 받아들여야 하는 공주의 숙명을 안타깝게 보여준다. 왕자군과 적군의 승패는 장황하게 전쟁 신을 묘사하는 대신 장검을 든 남성 2인무로 미니멀하게 처리된다. 라이브로 연주하는 활기찬 사물놀이에 맞춰 추는 바라춤도 볼거리다. 흰 옷을 입고 양 손에 든 커다란 바라를 부딪치며 빠른 동작으로 상하좌우의 공간을 가르는 역동적인 남성 4인무다.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청정한 도량을 지키기 위해서 불교음악 범패와 함께 전승되어오는 작법무용인 바라춤을 보는 것은 즐겁다.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해주면서 군더더기 없이 산뜻하게 마무리 짓는 드라마트루기도 세련되었다. 무대의 절반을 안개로 채워 이승과 저승 혹은 전설과 현실이 교차하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준 무대연출과 조명도 인상적이다. 춤과 함께 공연시간 내내 스크린을 장식하는 황정남의 영상도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해 큰 몫을 하고 한진국의 의상미도 빼놓을 수 없는 시각적 요소다.
인문학자인 이희수가 고대 페르시아의 구전 서사시인 쿠쉬나메를 원전으로 대본을 썼다. 같은 대본을 가지고 두 개의 작품이 만들어졌다. 하나는 최지연무브먼트가 연기자인 손병호와 함께 만든 <그 사람 쿠쉬, 천년의 사랑 쿠쉬나메>(12.3~4, 하늘극장)이고 <천>이 두 번째 작품이다. 동일한 원작을 기초로 하면서도 두 작품의 느낌은 판이하게 다르게 다가온다. <그 사람 쿠쉬>가 무용서사극 형식으로 무용가 외에 연기자들을 대거 등장시켜 역사적 사실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한 반면에 <천>은 춤꾼들로만 구성된 순수무용작품으로 이국땅에 묻혀 잊혀진 공주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영산재 형식을 택했다. 김성의, 임지애, 윤지예 등 기라성 같은 창무회의 춤꾼들이 군무를 통해 서정적인 여인 춤의 향기를 풍기고 남성 4인무로 이루어진 바라춤은 남성 춤의 힘과 활력을 발산한다. 대사 없는 춤이 연극보다 강력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면서 2014년 도미를 장식한 김선미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다.
*본 글은 서울문화투데이 2015.1.7일자 무용평론칼럼에 게재된 글을 수정한 내용입니다.
글_ 이근수(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사진_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