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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소통의 몸짓에 대한 기억 - 《역사를 몸으로 쓰다》

 《역사를 몸으로 쓰다》(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1원형전시실, 2017.9.22.-2018.1.21.)는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여러 퍼포먼스의 흔적을 전시한 기획전이다. 퍼포먼스는 쉽게 미술을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렇지만 이는 의식을 몸으로 표현하는 단순 행위일 수 있지만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호로 출발한다. 이번에 펼쳐진 전시는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퍼포먼스의 여러 몸짓들에 대한 이미지나 영상을 통한 재현이지만 무뎌진 최근의 문예에 대한 반성을 전해줌과 동시에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긴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 전시는 크게 세 개의 주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집단 기억과 문화를 퍼포밍하다는 1960년대 행위예술의 선구적 작품과 문화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결합된 모습을, 2. 일상의 몸짓, 사회적 안무는 초기 퍼포먼스의 급진성에서 벗어나 일상적 몸짓과 이를 통한 예술적 가치를 얻은 작품을 3. 공동체를 퍼포밍하다는 공동체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폐해를 해소하고자 한 집단 행위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주요 작품과 무용과 관련된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전시장에 처음 들어서면 백남준과 오노 요코를 함께 만나게 된다. 비디오 아티스트로 유명한 백남준이 처음 세인의 주목을 받은 것은 플럭서스와 해프닝 등 고답적인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무시한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머리를 위한 선>도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라 몬테 영의 ‘직선 하나를 긋고 그것을 따라가라’라는 코드에 대해 그는 머리에 잉크를 묻히고 선을 긋는 발상의 전환을 이루는데 이 작품을 본 관객은 이 기괴한 행동에 웃음으로 반응하여 주체와 객체의 괴리를 만들며 그 흔적을 전한다.

 오노 요코는 흔히 비틀즈 존 레논의 아내이며 비틀즈를 해체시킨 원인으로까지 세인에 오르내리는 인물이다. 그런데 우리가 잊고 있는 혹은 지나치고 있는 것은 그가 행위예술가이며 반전운동가란 점이다. ‘컷 피스’는 무대에 그는 가만히 앉아있고, 관중들을 무대로 오르게 하여 자신의 옷을 자르게 하는 퍼포먼스이다. 이 작품은 행위자가 아닌 관객에 의해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속옷이 잘려질 즈음 퍼포먼스도 멈추어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상징 혹은 페미니즘의 측면에서도 메시지를 던진다. 이런 두 행위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해프닝이지만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허물고 찰나를 통해 사회적 인식을 공유한다는 공통점을 지닐 것이다.



[사진 1]  올라퍼 엘리아슨, <미시적 움직임>(2011)


[사진 2] 남화연 / <약동하는 춤>(2017)

 2번째 공간의 ‘일상의 몸짓, 사회적 안무’는 과격한 초기 퍼포먼스에서 벗어나 조금 더 일상 속에서 조직화된 몸짓으로 표현됨을 드러낸다. 이는 집단 작업, 컬렉티비즘(Collectivism)에 중심을 두어 융복합적 결합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서는 무용이 중심된 두 작품에 주목할 수 있다. 남화연의 2017년 신작 <약동하는 춤>과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미시적 움직임>이 그러하다. <약동하는 춤>은 영화 <플래쉬 댄스>에 대한 동시대적 해석과 현재의 재해석을 남북한 비교로 보여준다. <플래쉬 댄스>의 ‘What a feeling’에 맞춘 춤을 1980년대 북한의 왕재산경음악단에서는 <약동하는 춤>이라고 명명하고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집단 군무에 의해 표현한다. 이 <플래쉬 댄스>를 현재 한국의 시각에서 재생산해보는데 유튜브를 통해 소통되는 뮤직비디오 형식을 취한다. 이 비트 있는 음악에 따른 중심 키워드는 ‘약동’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에 따라 인식은 달라지고, 시대를 달리하여 소비하는 체제도 변화됨을 드러낸다.

 올라퍼 엘리아슨의 <미시적 움직임>은 그의 스튜디오에서 일상적으로 일하는 직원과 느리게 움직이는 10명의 무용수를 대비시켜 불규칙한 바쁜 일상과 규칙적인 느린 움직임을 표현한다. 일상에 대한 인식과 자아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킬 모티브를 지닌다.

 ‘공동체를 퍼포밍하다’에서는 옥인 콜렉티브의 경우처럼 옥인아파트나 후쿠시마 등의 파괴된 사회적 상징에서 기억과 이에 대한 치유가 함께 이루어지는데 퍼포먼스가 가지는 공공선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행위에 있어 즉흥적, 순간적이다. 그래서 있는 현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퍼포먼스와 무용의 차이는 무엇일까? 무용은 이러한 의식을 포괄하면서 찰나의 인식을 서사구조에 담아 표현해 내는 행위이다. 이는 퍼포먼스처럼 즉각적이지는 않지만 무용수의 몸짓을 통해 사회적 총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예술적 행위인 것이다.

 그렇지만 요즘 작품을 보면 사회 인식에 소홀하여 추상성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저 자기인식의 도그마에 빠져 있거나 사회 속 자아가 아닌 극히 미시적 표현에 머물러 관객과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엽적 시각이거나 혹은 사회적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초기 퍼포먼스가 그러하듯 혁신이나 관객과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체되어 있는 무용에서 진보는 더디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몸짓은 가장 순수한 표현이기에 가장 사회적일 수 있다는 본질적인 명제도 다시금 생각하게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글_ 김호연(문화평론가)
사진_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사진 출처_
사진 1_ 작가 및 노이게리엠 슈나이더(베를린) 제공, ⓒ 올라퍼 엘리아슨
사진 2_ 작가 제공, 오석근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