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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의 말에서 댄서의 집까지, 무용수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 국립현대무용단 〈댄서 하우스〉

 국립현대무용단이 지난 12월 올려진 두 편의 공연 <댄서 하우스>와 <투오넬라의 백조>로 신임 예술감독의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현대무용단의 세 번째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안성수 예술감독은 국정 농단과 블랙리스트 사태 등 문화예술계 전반이 어수선하던 시기에 부임해 기대보다는 우려 속에 임기를 시작했다. 직접 안무한 신작과 해외 아티스트와의 협업, 젊은 안무가들의 실험무대 등을 고르게 배치하며 예술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당연하면서도 우직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안 예술감독의 행보를, 무용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으로 지켜보았다.

 새로운 리더를 맞이한 단체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역사의 단절을 겪는다. 제한된 임기 동안 이렇다 할 업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과 맞닥뜨리게 된 리더는 단체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기 가장 좋은 방법인 전임자의 발자취를 지우고 새로운 발자국을 남기는 데 몰두하곤 한다. 물론 무수한 단절을 겪으면서도 단체의 역사는 이어지기 마련이지만 새로운 리더의 부임은 곧잘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되어 ‘단절’의 ‘계승’이라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안 예술감독의 1년차 프로그래밍을 이 같은 역사의 단절과 계승이라는 돋보기로 바라본다면 더욱 흥미로운 관전이 가능해진다. 세 명의 안무가가 같은 음악으로 작업한 서로 다른 결과물을 만날 수 있었던 <쓰리 볼레로>는 안애순 전 예술감독 시절 코리안심포니와의 협연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오케코레오그래피>와 맥락이 닿아 있고 댄스엘라지 수상자들의 무대로 꾸며진 권령은과 정세영의 픽업스테이지에서는 젊은 안무가들의 실험무대였던 안무랩의 자취가 느껴진다. 그리고 연말 공연 <댄서 하우스>는 송년 인기 레퍼토리였던 <춤이 말하다>의 개정판으로 볼 수 있다. 현대무용단은 내년 공연 라인업을 올해와 마찬가지로 예술감독 신작과 세 개의 픽업스테이지, <쓰리 볼레로>와 <댄서 하우스> 두 개의 레퍼토리로 예고하고 있는데, 예술감독 부임 2년차가 지나면 단절과 계승이라는 역사의 맥락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과 결별하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 현대무용단의 단절과 계승의 역사를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것은 여러 프로그램들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공연이라 할 <댄서 하우스>다. 전임 감독 시절 <춤이 말하다>가 지니고 있었던 여러 갈래의 서로 다른 맥락, 자연인으로 무용수 개인이 내는 목소리와 각각의 장르를 대표해 링에 오른 듯한 무거운 사명감, 춤에 무지한 대중을 향해 전문인 입장으로 ‘춤’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주제의식, 공연이 거듭됨에 따라 같은 주제를 반복해선 안 되고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기획의 관점, 그렇지만 송년 공연으로 올려지는 연말 상품으로서의 대중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조바심까지, 무용수가 바삐 목소리를 내고 움직임을 보여주었던 공연은 춤을 모르는 대중에게 춤을 말해주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무용수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무용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연의 제목이 ‘댄서 하우스’인 것은 퍽 의미심장하다. 댄서의 ‘집’은 무용수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연습실이 될 수도 있고 다양한 움직임을 품은 무용수의 몸 자체일 수도 있으며 어떤 움직임을 시작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감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댄서의 집은, 당연하게도, 댄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렉처 퍼포먼스라는 동일한 형식과 스타무용수의 존재감을 유지하면서도 <댄서 하우스>는 <춤이 말하다>가 ‘춤’에 맞췄던 포커스를 무용수에게로 이동시킨다.

 무용수들은 자신이 추어온 춤이 어떤 장르인지, 그 장르의 춤은 어떤 문법 위에서 추어지는지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이 현재 시점에서 고민하고 있는 화두를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 안에서 추어지는 춤은 그들이 걸어온 춤길을 일별하는 하나의 주마등이 된다. 무용수들은 말하고 춤추지만, 말은 더 이상 춤을 설명해주는 보조수단이 아니다. 대신 춤이 무용수의 말을 떠받친다.




 김용걸과 김지영은 춤으로 하나의 세계를 완성한 이들이 정점을 찍고 나서 은퇴를 생각해야 하는 인간적인 두려움에 대해, 춤추던 몸으로 삶을 연기하는 사람이 된 한예리와 김남건/백석광은 춤과 연기의 이어짐 혹은 어긋남에 대해, 성창용과 최수진은 무엇이 자신을 춤추게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삶이 춤이 되는 어떤 순간을 관객들과 공유한다.

 배우 백석광으로 무용수 김남건의 춤을 이야기하는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보여준 김남건/백석광의 무대는 ‘댄서 하우스’라는 공연의 의미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 자리였다. 그는 무용원 시절 무용계의 고질적인 적폐 중 하나인 군기문화, 선배들에 의해 후배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으로 인해 한쪽 귀의 청력을 잃은 경험을 털어놓으며 콩쿠르 문화 뒤에서 돈이 사람을 일그러지게 만드는 무용계의 어두운 면모, 그래서 결국 무용계를 떠나게 된 이야기를 담담한 어조로 이어간다. (물론 그는 무용을 그만둔 이유가 그때 당한 폭력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했으나 그 많은 이유들 중에서 이 경험을 꺼낸 데에는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할 공간이 많아’ 좋던 한국춤의 너른 품 안에서 부당하다고 생각할 여지없이 견뎌야 하는 폭력이 자행될 때 무용수 개인의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대개는 남아서 견디거나 그 세계를 떠나는 것이다. 이때 무용수의 집은 더 이상 무용수를 보호해주는 안락한 공간이 아니라 안전을 위해 떠나야 할 위험천만한 곳이 된다.




 <춤이 말하다>에서 무용수의 입을 빌어 춤에 대해, 장르의 문법에 대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춤’을 말하려던 시도는 <댄서 하우스>에 이르러 무용수 자신이 춤과 맺는 관계를 통해 개개인의 좀 더 내밀한 표정을 드러내는 ‘댄서’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를 작품에서 무용수로 이어지는 대중의 관심을 포착한 것으로도, 또는 그동안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도구에 불과했던 무용수가 인간으로 발견되기 시작한 과도기적 징후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무용수가 아름다운 라인으로 잘 움직이는 몸을 전시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생각을 입으로 전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용수가 입을 여는 것을 꺼려하는 이 세계에 작지 않은 균열을 낼 것이다. 관객들 역시 무용수가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집을 찾아가는 과정을 밝은 눈으로 뒤따라갈 것이다. 한 해를 마감하는 끝자락에서 무용수의 말과 몸을 함께 생각하게 만든 이 공연이 <춤이 말하다>에서 <댄서 하우스>를 지나 어디로 갈지 계속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_ 국립현대무용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