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젊은 예술가 발굴 프로젝트 ‘AYAF(ARKO Young Art Frontier)’로 선정된 안무가 박연정이 연출과 출연을 맡은 <망구(望九)-그믐달>이 1월 20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아르코(ARKO)가 주목하는 젊은 예술가 시리즈’로 공연된 이번 작품은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안무가 박연정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무대였다. 그녀는 이미 2012년부터 망구 시리즈를 이어왔는데, <망구(望九)-그믐달>은 지난 1년간 진행한 연구 활동, 멘토링, 해외 리서치 등을 통해 얻은 결과물을 의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색적인 토이 피아노와 우리 전통노래인 정가도 라이브로 진행되며 작품에 잘 동화되고 있었는데, 안정아가 부르는 정가와 차혜리가 연주하는 토이 피아노는 동심과 그리움의 세계를 아련하게 자극했다.
박연정의 연출은 공연장 입구에서부터 지하 2층을 활용해 로비 퍼포먼스를 기획하면서 관객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로비에는 영상과 함께 라이브로 소리를 하고 이에 맞춰 무용수들은 공간움직임을 연출하며 관객들을 천천히 지하 로비로 안내했고, 토이 피아노와 정가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펼쳐지는 박연정의 춤과 퍼포먼스는 1인극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망구(望九)는 90세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여든 한 살의 별칭이다. 박연정은 작품을 통해 팔순 늙은이의 지난 날 사랑과 청춘, 열정을 그믐달에 비유하여 표현하면서 봉산탈춤에서 미얄할미의 특성을 살려냈다. 움직임 측면에서 실룩거리는 엉덩이, 덩실거리는 춤사위, 지면과 가까운 낮은 자세, 어부바를 연상시키는 몸짓, 슬픔조차도 초월한 웃음기 가득한 표정 등에서 가장 작아진 달, 즉, 그믐달의 사그라짐에 젊음을 상실한 여인을 투영했다. 더불어 기교적인 춤사위가 아니라 절제된 몸짓이 진솔하게 느껴졌다.
안무가가 고심한 흔적이 돋보이는 부분은 다양한 미장센과 공간연출에서 두드러졌다. 곡선 길을 따라 극장 안으로 들어가고, 누런 재생종이로 무대 공간 전체를 새롭게 구성한 부분도 신선했다. 두꺼운 재생종이는 구기는 대로 자연적인 형태가 생기며 울퉁불퉁한 땅의 이미지를 살려냈고, 망구가 들고 나와 악기처럼 박자에 맞춰 부스럭거리는 검은 비닐봉지도 상징성을 지녔다. 재생종이나 비닐봉지는 흔하게 쓰고 버리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제는 쓰일 곳이 없는 물체와 망구의 존재감이 유사하게 일치한다. 토속적인 느낌의 공간에 스테인레스 요강이 허공에 매달려있고 모빌처럼 보이는 뼈대만 남은 우산살(이곳에는 나무뿌리, 그믐달 모형, 어린 소녀의 형상)도 하수에 걸려있다. 이 우산살에 손전등을 비추면, 참(Charm)처럼 달려있던 형상들이 재생종이 위에 나타나는데, 그 그림자 형상들은 망구의 일생을 그리는 동시에 마침내 그믐달이 나타난다. 그믐달은 할머니의 소멸과 재생, 부활을 동시에 담는 매개체였다.
작품 속에서 망구는 요강을 깔고 앉아 소변보는 듯한 모습도 연출하는데 다산을 상징하는 요강을 사용해 기원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요강에 전등을 넣기도 하고 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요강을 집어넣어 치마 속 요강에서 둥근 빛이 비치며 마치 임신한 여인의 배처럼 부풀어오르는 장면은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다. 백드롭 그림자를 통해 태아와 어머니의 교감이 따스하게 전달되는 부드러운 장면에 감춰진 속내도 가볍지 않았던 것이다. 후반부 재생 종이를 한쪽으로 말아 크게 뭉쳐 올려 마치 사람처럼 인물화 시키기도 하고 변형된 공간을 완성하기도 했다. 토이 피아노 위에 올라가 그 종이뭉치를 붙들고 하는 움직임들과 박연정이 조끼를 벗어들고 보이는 솔로가 이어지면서 다소 밀도가 떨어져가기는 했지만 중앙 공중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쌀알들의 이미지, 작은 방울들을 들고 춤추는 모습과 울림이 다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박연정은 다시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실룩실룩 흥겨운 춤을 보이며 여운을 남겼다.
1인극처럼 보이는 공연에서 박연정의 재치와 아이디어, 코믹함과 슬픔이 혼재한 얼굴, 정가를 부르는 안정아의 도움을 곳곳에 받기는 했지만 독자적으로 공연을 끌어가는 그녀의 흡인력은 뛰어났다. 더불어 안정아의 청아한 목소리와 미얄할미의 어린 시절을 연상케 하는 외모,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점도 작품을 한층 끌어올렸고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토이 피아노의 활용도 이색적이었다. <망구(望九)-그믐달> 공연은 때로는 흥겨운 놀이마당이기도 했고, 한 여인의 여성으로서 삶의 순환과정을 담은 여정이기도 했으며 그것이 성공적이든 아니든 박연정이라는 안무가를 서울 무대에 각인시킨 시간이었다.
*본 글은 월간 무용잡지 <춤과 사람들>에 동일하게 실린 내용입니다.
글_ 장지원(무용평론가,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이호형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