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박재현은 <고독> 시리즈 첫 번째 <고독: 드라마>를 올렸다. 이 시리즈는 네 번째 <고독: 명품>(박재현 안무, 춤 / 2018.05.20. 부산민주공원 소극장)에 이르기까지 지원금 한 푼 받지 않고 무대를 만들었다. 만만치 않은 이력의 춤꾼이 지원금을 마다하고 주위 스태프와의 재능 연대만을 기반으로 공연을 올린 것이다. 팸플릿에 새긴 “<고독> 시리즈는 지구상 어떤 곳의 지원도 받지 않은 공연입니다”라는 문구는 자부심의 표현이자 지원금에 목을 매는 현실에 대한 유쾌한 도발이다.
관객이 입장하는 중에 무대에는 정장 차림의 한 사람이 식칼을 쥐고 서 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개의치 않고 그의 시선은 칼끝을 바라본다. 주위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투박하지만 날카로운 칼끝은 오른쪽으로 호를 그리듯 천천히 움직인다. 마치 주위 모든 것의 ‘접근-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듯하다. 작품 주제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은 관객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연출된다.
소외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가 만든 상황이라면 고독은 자기 선택의 결과이다. 사회문제가 된 ‘고독사(孤獨死)’는 정확하게 말하면 ‘소외사(疏外死)’이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혼자 죽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회관계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박재현이 쥔 칼은 자신이 소외를 당한 것이 아니라 고독을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주위를 겨냥하던 칼이 서서히 방향을 바꾸어 자신을 향하는 동작은 스스로 ‘고독을 선택’하였고 그 결과를 온전히 감당하겠다는 선언적 행위이다.
<고독: 명품>은 플롯과 서사가 없다. 칼을 쥔 채 “나는 왜 태어났을 때 죽지 못했을까”를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첫 장면과 이와 똑같은 마지막 장면이 박재현이 이 작품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 전부이다. 그 중간에 펼쳐지는 상황, 움직임, 소리는 ‘즉흥적이고 산만하고 자기도취적이고 분방한’ 박재현식 나열이다. 관객이 의미 찾기에 당황하는 동안 맥락을 찾기 힘든 퍼포먼스는 관객을 개의치 않고 독백처럼 흘러간다. 나열은 나열일 뿐이다. 의미는 숨어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너무나 확실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관객은 오히려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고독: 명품>은 흐트러진 이미지이고 조각난 상상을 어긋나게 짜 맞춘 기묘한 퍼즐이다. 만약 그것에 관해 설명이 필요하다면 형용 모순적 표현만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관객은 박재현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파격성, 독창성에 만족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무대용 소품이 아닌 실물 칼이 주는 아슬아슬하고 섬뜩한 기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책상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빈틈이 보이는 어수선한 세트, 정교하지 못한 조명은 관객의 시각과 감성을 무대에 묶어두는 데 걸림돌이었다. 하나의 춤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새로운 맥락을 만드는 일이다. 맥락은 흐름과 세부(디테일)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
박재현의 공연 스타일이 ‘즉흥적이고 산만하고 자기도취적이고 분방한’ 것이고 그래서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려 했다고 해도 무대 위에서 드러나는 모든 감각적 요소들은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어야 한다. 맥락은 그런 것이다. 날것을 보여 주려면 날것을 그저 던져 놓을 것이 아니라 날것으로 드러나고, 날것이 돋보이는 맥락을 만들어야 한다.
날것으로 드러나는 무대가 더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관객이 작품에서 날것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맥락과 디테일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돼지 시체를 던져 놓을 것이 아니라 껍질을 벗기고 뼈도 발랐지만, 핏기가 도는 그런 날것. 금방 요리하고 싶은 날것인 고기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 무대화한 작품은 관객의 오독(誤讀)으로 무한히 해석의 지평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공연예술에서 관객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만약 날것이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무대 요소의 역할을 못 한다면 <고독>은 ‘고독’이 아니라 ‘소외’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부족한 맥락, 애매한 날것의 상태 등 관객을 당황하게 하는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박재현의 춤 혹은 행위가 던지는 의미는 분명하다. 링기스(Lingis, Alphonso)는 “개인들은 소통행위를 통해 언어, 역사, 지식 등에 통합되는데, 이때 개개인 고유의 개인성은 상실된다. 이런 ‘합리화 과정’에 저항하는 자는 정신질환자, 위험인물, 야생인간 등으로 낙인찍히고, 공동체를 향해 복종할 것을 강요당한다”(『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2013, 바다, 알폰소 링기스)고 말한다. 개성이 중요한 춤에서도 가장 ‘합리적 공동체’가 된 춤판의 주류는 역사, 전통, 권위, 규칙이라는 빛바랜 명패를 내세우며 개인을 억압하고 소모한다. 박재현의 춤은 이런 주류 중심 문화에 대한 교묘한 도발이다. 주류가 자신을 소외시키기 전에 칼을 들어 그것과의 ‘접근-관계’ 맺기를 거부한다. 당하기 전에 선택함으로써 상실할 수도 있는 개인성을 지켜 내려는 것이다.
공연 팸플릿에 “지난 세 번의 공연에서 선보인 박재현의 <고독>은 동물적인 날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몸짓”이었고. “그로 인해 몸엔 깊은 흉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표현이 있다. 욕망의 성취나 해소는 자기착취가 바탕이다. 구도적 몰두에까지 닿은 자기착취는 다행하게도 타인을 해치지 않았고 자신에게만 흉터를 남겼다. 그렇게 상처 입은 몸은 불결해 보이지만 성스럽기도 하다. 오직 자신에게 몰두하는 춤, 그래서 춤이 아닌 것과의 경계를 무화(無化)하는 <고독: 명품>은 폭력적 공동체로부터 개인성을 지키려는 ‘성스러운 자기착취의 독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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