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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어떻게 작품을 만들고 안무가를 키울 것인가, 해묵은 고민에 대한 조용하지만 단단한 대답 - 서울발레시어터 기획공연 〈Colla.B〉


 서울발레시어터에서 ‘Refresh, SBT!’라는 슬로건과 함께 기획공연 를 선보였다. 공연명 는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과 발레(Ballet)를 결합한 합성어로,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타 장르와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컨템포러리 발레의 현재를 묻는다. 올해 초 서울발레시어터의 3대 단장으로 취임한 최진수 단장은 1995년 김인희 단장과 제임스전 예술감독에 의해 클래식 발레와는 다른 한국의 모던발레를 만든다는 기치를 내걸고 창단된 서울발레시어터의 정신을, 23년이 지난 2018년에 와서 다른 장르의 춤과 만난 발레를 통해 장르의 경계를 질문하는 것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장르 융합 또는 장르 파괴는 예술계가 지겹도록 되풀이해온 식상한 화두인 동시에, 다른 매체들이 만나 이루어내는 시각적인 충격 외에 서로 다른 장르의 만남으로 무엇을 만들어내고자 하는지, 그 결과물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완성도를 보여준 적은 없는 까다로운 접근방식이다. 장르의 융합이나 파괴라는 실험에 매몰되어 이를 통해 말하거나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기본적인 방향 설정도 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난삽한 생각들을 펼쳐놓는 데 급급한 창작자들은 현실에 너무나 많고, 이에 대한 관객들의 불신과 피로감 역시 쌓일 대로 쌓여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식상하고 다루기 까다로운 장르 융합 또는 장르 파괴라는 방식은 자신의 장르 안에서 직진만 해온 창작자들에게는 매우 신선한 자극이 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단, 창작자들이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멍석을 펼쳐준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서울발레시어터의 는 한국무용, 현대무용, 재즈댄스라는 저마다 다른 분야에서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작업으로 각각의 영역을 만들어온 장혜림, 이나현, 김희정과 발레리노 출신 사진작가로 독특한 비주얼을 선보여온 박귀섭이 서울발레시어터의 무용수들을 재료 삼아 작업한 네 편의 작품을 보여주는 무대였다.




 장혜림은 쿠르드족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PKK의 젊은 여성군인들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장미의 땅: 쿠르드의 여전사들’에서 영감을 받은 <장미의 땅>을 선보였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여성군인들의 강인한 아름다움을 작품의 모티브로 삼아 불안한 감정과 빠른 움직임을 조화시키며 긴장감 있는 무대를 만들어냈는데, 특히 토슈즈를 타악기처럼 사용해 토슈즈로 바닥을 두드리는 타악의 리듬에 맞춰 무용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장면은 창작자의 신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동시에 한국무용과 발레라는 다른 장르의 경험이 만났을 때 어떤 새로운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이나현은 를 통해 집단과 개인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주목하며 전작 <시선의 온도>에서부터 이어온 권력이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의 문제를 움직임으로 풀어냈다. 경험 많은 안무가답게 20분여의 짧은 작품 안에서 메시지에 따른 움직임 구성을 매우 효율적으로 해내어 완성도와 안정감을 가져간 반면 안무가 이나현의 색깔은 드러났으되, 이 작업을 굳이 서울발레시어터의 발레무용수들과 했을 때의 특징할만한 점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김희정의 작품 도 이나현의 작품과 다소 비슷한 인상을 남겼는데, 김희정이 안무가의 변에서 털어놓은 것처럼 발레무용수들은 익숙한 발레 움직임과 표현방식에서 벗어나 재즈댄스에서 요구하는 보다 감정의 진폭이 큰 격렬한 표현과 움직임을 아직 다 받아들이지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다 보니 안무의 전개과정에서 드러난 김희정의 색깔이 아직 서울발레시어터의 무용수들에게까지 다 흡수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은 채 약속된 안무를 성실히 수행한다는 인상으로 남았다.




 첫 안무작 를 선보인 박귀섭은 그동안 사진작업을 하면서 비주얼 아티스트로 경험해온 것들을 아낌없이 무대 위에 쏟아냈다. 창작자들이 닳도록 애용해온 주제인 ‘당신은 누가 정해준 것이 아닌 당신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자기계발서의 메시지로는 아직까지 유효할지 모르나 예술계에서 창작자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건드려봤을 진부한 메시지를 ‘선율’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해 신선한 이미지로 풀어냈다.

 작품이 시작되기 전 무대에서는 안무가의 짧은 인터뷰가 함께 공개되었는데, 박귀섭은 첫 안무작을 내놓는 설렘과 불안을 토로하면서 무용수 출신으로 이 작업에 임하면서 무용수들이 겪었을 어려움에 대한 이해를 내비쳤다. 박귀섭의 인터뷰는 공연에 대한 짤막한 힌트를 던져준다. 서울발레시어터 무용수들은 네 안무가와 네 편의 작업을 하며 많게는 세 편의 작품에 출연해야 했는데, 위에서 언급했듯 무용수들의 움직임에서 안무가의 색깔이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은 것은 이러한 현실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서울발레시어터에 더 많은 무용수들이 있어 더 적은 편수의 작품에 출연할 수 있었다면 안무가와 좀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좀 더 작품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위에서 언급한 아쉬움들이 해소된 훨씬 완성도 있는 무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무대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아니다.

 전속단원이 있는 무용단체에서 외부 안무가를 초청해 크리에이션 작업을 하는 것은 외국 발레단에서는 보편화된 방식이지만 아직까지 국내 발레계에 정착된 방식은 아니다. 아니, 국내 발레계에는 안무가 육성이나 크리에이션 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스템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전속단원을 두고 신작을 제작할 수 있는 단체가 몇 곳 되지도 않는 데다, 그 몇몇 단체마저 안정적인 신작 제작 시스템을 갖춘 것도 아니다. 국립발레단에서는 최태지 단장 시절 현재의 버전으로 다듬은 <왕자 호동>이 제작 후 레퍼토리화 되었으나 앞으로의 재공연이 불투명하고, 강수진 단장이 부임 후 세 차례 선보인 ‘KNB MOVEMENT SERIES’는 올해 공연 프로그램에서 사라져 역시 앞으로 어떻게 운영될지 프로그램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유니버설발레단은 <심청>과 <춘향> 등 한국 고전을 발레로 옮긴 한국 창작발레 작업에 주력하고 있고 광주시립발레단은 박금자 단장 시절 <명성황후>나 <성웅 이순신>처럼 한국 역사 속 인물의 생애를 발레로 옮기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지만 이 작업들은 안무가 육성과는 거리가 있다. 아직까지 국내 발레계의 역량은 무용수 육성과 공연사업에 집중되어 있으며 컨템포러리 발레의 의제 설정이나 신작의 제작과 유통 시스템, 안무가 육성과 실험무대 확보, 이들을 가능케 할 민간발레단의 존립과 시장 개척 방안 등의 논의는 뒷전인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서울발레시어터의 이번 기획공연이 경기문화재단 상주단체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단체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는 전속단원들이 있고 기획력 있는 리더가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었기에 가능한 공연이었지만 민간에서 예술단체를 운영하며 23년간 축적된 작품 제작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지원사업 제도가 없었다면 기획 자체가 불가능했을 공연이었다. 이번 공연에 올려진 네 편의 작품 중에 서울발레시어터의 레퍼토리로 편입되어 살아남을 작품이 있을지보다, 서울발레시어터가 이번 기획공연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제작 역량을 가진 단체가 신작을 생산하고 유통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발레계 전체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획공연이 서울발레시어터 한 곳의 단발적인 이벤트 공연으로 그친다면 이는 서울발레시어터의 진보가 아니라 발레계 전체의 퇴보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번 공연에서 서울발레시어터가 해낸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발레계에 이식한다면 발레계는 중요한 변곡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작은 민간발레단이 쏘아올린 공이 어디로 가게 될지, 서울발레시어터의 다음 한 걸음과 발레계 전체의 다음 한 걸음을 함께 지켜볼 일이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_ 서울발레시어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