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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삶에 공감하는 춤 - 방영미의 〈길에 이르는 길〉, 정기정의 〈바랄꽃〉


 어설픈 장마가 지난 자리에 냉큼 폭염이 들어선 7월, 타자의 삶에 공감하는 두 가지 방식의 춤이 연이어 무대(부산민주공원 소극장)에 올랐다. 개인의 인생에 삶의 보편적 가치가 녹아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현재 아픔을 반추한 방영미의 (2018.07.13.)과 황석영 소설 『심청』을 소재 삼아 삶의 절망적 상황을 굿의 형식을 빌려 해원(解冤)하고 극복하는 정기정의 <바랄꽃>(2018.07.15.)이 그것이다. 방영미와 정기정은 같은 무용단(하야로비) 소속으로 오랜 시간 함께 춤을 추었다. 어쩔 수 없이 한때 춤을 쉬어야 했던 경험마저 닮은 두 사람은 춤꾼이 조로(早老)하는 지역의 춤판에서 현역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중견 춤꾼이다.


아픔을 반추하다 - 서성이는 몸, 서글픈 관능

 방영미의 <길에 이르는 길>은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생긴 회한을 낮고 짙은 호흡과 절제된 감정으로 끌고 간다. 칠흑 같은 어둠을 날카롭게 찢은 빛줄기 속 작은 의자에 앉아 한 여인이 책을 읽는다. 찢긴 어둠에서 나온 스멀거리는 손은 평온해 보이는 이 장면에 섬뜩한 불안을 가져온다. 어둠의 손길은 여인이 당황하는 틈에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책을 빼앗아 간다. 책을 빼앗긴 것은 삶의 기준과 주도권이 사라지고 자신의 의지를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욕망 혹은 유혹을 상징하는 두 남자는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차지하려고 뒤엉킨다. 혼란 속에 책은 갈기갈기 찢기고 그들이 사라진 바닥에는 찢어진 책장이 어지럽게 뒹군다. 어쩌다 여기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이야기책에 담긴 것처럼 적당한 고난과 소소한 걱정거리 말고는 여인은 자신의 삶이 그런대로 평온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삶의 일부분이기도 한 유혹과 욕망이 만든 잔해는 내딛는 걸음마다 여인의 발끝에 달라붙는다. 길의 끝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저 멀리 보이는 빛은 힘겹게 다가갈수록 오히려 그녀를 밀어낸다. 불안한 미지의 것 안으로 들어설지 그 자리에 주저앉을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서글픈 관능을 새긴 몸은 주위를 가늠할 수 없는 혼돈 속 몽환의 숲에 우두커니 서 있다.





 <길에 이르는 길>은 ‘1부(도입), 2부(갈등), 3부(모색)’로 짜였는데, 1, 2부가 3부를 추동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3부는 앞의 추동이 없어도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3부 자체가 완결된 구조로 되어 있고 안무자의 의도가 집약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직접 작곡과 연주를 한 이세호의 음악은 멜로디를 최소화해서 춤의 집중도를 높였고 작품의 감성을 고조시켰다. 또한 섬세한 연출과 군더더기 없는 조명은 불필요한 잡음(요소)을 제거하였다. 이 때문에 안무자가 드러낸 삶의 아픔이 관객과 충분히 공감대를 형설 할 수 있었다. 다만 여인과 두 남자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장면이 없었던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몸을 낮게 깔면서 사지를 확산하는 방영미의 독특한 호흡과 역동적인 남자 춤이 대비되는 장면이 있었다면 이들 세 사람의 관계가 선명해지고 작품 흐름에 입체감이 배가되었을 것이다.


삶이 위로하는 삶 – 흔들림만으로 빛나는 꽃

 <바랄꽃>은 황석영의 장편소설 『심청』의 이야기 구조를 차용했다. 황석영은 기존 심청전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전근대와 근대의 전환기이고 공간적 배경을 동아시아 전역으로 넓혀놓았다. 이런 배경에서 심청의 삶에 극적인 인생역정을 만들어 낸다.




 <바랄꽃>은 소설 『심청』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상수 뒤편 바위를 상징하는 세트에서 인형을 아래로 던지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춤꾼은 인형이 상징하는 심청이 되어 전락과 정화, 타락과 승화, 성장과 해탈의 온갖 인생역정을 겪는다. 후반부에 도당굿 살풀이로 이전의 모든 과정을 해원(解冤)하고 띠배에 인형을 실어 바다로 떠나보낸다. 작품의 제목 바랄꽃은 누구의 손도 닿지 못하는 깎아지른 벼랑 틈에 핀다고 한다. 감당하기 힘든 척박한 상황에서도 꽃을 피우는 생명의 의지를 상징하는 제목이다.







 안무자는 8명의 연주자에게 3, 40명이 앉을 수 있는 소극장 객석 한 면을 할애했다. 이는 관객을 적게 수용하더라도 작품 완성도를 선택하겠다는 의지이다. 그래서인지 <바랄꽃>은 음악 춤극이라고 해도 충분 할 만큼 음악이 춤과 어우러지는 조화와 균형이 좋았다. 독특한 표정과 움직임으로 관객의 몰입을 극대화한 남도욱과 정기정의 춤은 공간을 흔들고 시선을 장악하였다. 특히 정기정의 살풀이는 진정한 해원이 가능하게 하는 제대로 추는 살풀이다. 수건 한 장 들고 곱고 이쁘게 추는 춤으로 삶에 켜켜이 쌓인 한(恨)과 살(煞)을 어떻게 푼다는 말인가. 정기정의 살풀이는 <바랄꽃>의 모든 것을 수렴할 만큼 강력하다. 음악과 출연자 기량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바랄꽃>은 몇 가지 아쉬움을 안고 있다. 첫째, 소설의 이야기 구조에 지나치게 충실했다는 점이다. 모티브 삼은 소설의 구조는 취하고 곧 버려도 될 것인데, 소설 내용을 동어반복 하는 춤 구성은 작품을 느슨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둘째, 마지막 부분에서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고 감정을 끝까지 소진한 것은 관객이 감상으로 해결할 몫을 빼앗는 과잉 친절이거나 작품 메시지 자체의 잡음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내용을 담기에 60분은 그리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소설을 소재로 삼을 때, 주어진 공연시간(길이)과 춤의 특성에 맞도록 축약, 절제해서 재구성하는 것이 안무와 연출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들의 춤

 춤의 궁극은 삶을 담아내는 것이다. 춤으로 살고, 삶을 춤에 온전히 녹여내는 지점이야말로 춤꾼이 도달하려는 곳이다. 하지만 춤으로 시작한 삶이 욕망과 권위로 끝을 맺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때 춤은 예술이 아니라 도구로 전락하고 삶은 춤과 괴리된다. 실패의 능선을 수도 없이 넘어오면서도 기어이 춤추는 방영미, 정기정의 무대가 의미 있는 이유는 이들의 작업에서 삶과 춤이 일치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처럼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들은 타자가 혼자 죽어가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내 삶의 아픔을 드러내어 공감하고(길에 이르는 길), 타자를 위로(바랄꽃)한다. 이것은 춤의 본디 가치이기도 하다. 삶이 된 춤 말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들은 이처럼 춤으로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해원(解冤) 한다.


글_ 이상헌(춤비평, 민주주의사회연구소 연구원)
사진_ 박병민(춤 전문 사진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