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호 선생의 신작 <무위(無爲)>가 9월 19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서 관객과 호흡을 나눴다. 대작 위주의 무용극으로 명성을 날린 그가 70세를 맞아 40년 가까이 차이 나는 무용수들과 소극장 무대에서 함께 하며 소극장이 지향하는 관객과 공연자의 경계 허물기를 실현한 것이다. 이번 공연은 땅, 하늘, 공기, 물처럼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 너무도 가깝고 친숙하다는 이유로 그 소중함을 인지하지 못하듯 무용가들의 삶에 전체를 이루는 신체와 움직임이라는 본질을 칠순의 나이에 더욱 진지하게 자각한 결실이었다. 국수호 선생의 연륜과 젊은 무용수들의 패기가 시너지 효과를 거두며 화려한 기교의 과시나 스펙터클한 구성이 없어도 오히려 그 담백함이 진실 되고 깊이 있게 다가왔던 모처럼의 울림이 있는 시간이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자연 혹은 그런 이상적인 경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무위‘(無爲)’란 자연에 따라 행위하고 사람의 생각이나 힘을 더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용수와 관객을 포근하게 감싼 작은 공간은 무위자연을 반영했고 인위적이지 않고 때로는 즉흥처럼 생각이나 힘을 더하지 않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무위를 정의 그대로 표현했다. 특히 디딤무용단 소속 무용수 6명(이민선, 황근영, 김유섭, 백아람, 이민주, 송영림)과 국립무용단 주역이었던 조재혁, 한국무용 창작작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장혜림이 중심을 이루며 유수의 음악가들(강상구, 유경화, 김준수, 이소연)이 이에 큰 에너지를 더해 공기를 장악했다.
공연 시작 전, 바닥 중심에 흰 원이 위치하고 그 외곽을 무용수들이 다시 볍씨로 테두리를 엮는다. 이곳은 춤추는 공간이기도 하고 그 원형 바깥에 아쟁, 생황, 타악기와 첼로나 피아노 등의 악기가 위치하며 연주의 공간이기도 하다. 국악과 양악의 조화를 도모하는 국수호 선생의 특성이 이번에도 잘 드러났고 원형을 따라 이동하며 에너지의 확장과 밀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뛰어난 기량을 지닌 무용수들의 들숨과 날숨의 자유자재의 조절은 숨막히는 긴장감을 조성했다. 원형은 단결과 자연스러움, 우리의 토속적이면서도 친숙한 터전, 제의의 형태이기도 하다. 따라서 간결한 미장센이지만 하늘과 땅 사이의 인간사를 담아내는 삶의 터전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었고, 9장으로 세분화된 설정이 짜임새를 갖추고 맥락을 형성하는 것도 그의 공력(功力)이었다.
땅을 의미하는 장혜림의 느린 춤사위를 시작으로 이후 행렬로 이어지는 무용수들의 군무는 단아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응집된 힘의 표출은 대단했다. 더불어 장혜림은 그간 안무력을 인정받았지만 이번 무대를 통해 뛰어난 춤기량을 겸비했음을 확고히 드러냈다. 청아하면서도 내강의 연주에 맞춰 여자 솔로와 군무가 이어진 후 하늘을 대변하는 조재혁이 등장해 자신의 춤을 펼치는데, 역동적인 강렬함보다는 숨겨진 에너지가 깊숙이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이어진 군무진들의 긴 수건을 사용한 춤사위들은 살풀이 수건에 담긴 애절함의 느낌을 수반했고, 원형의 작은 공간 속에서 흩날림을 통해 확장된 시공을 완성했다. 개개인의 기본기도 좋았지만 군무의 어울림은 안정적이었으며 장혜림과 조재혁의 이인무는 하늘과 땅의 조화와 균형을 나타냈다. 흙의 신을 의미하는 국수호 선생은 바닥의 볍씨를 주워 뿌리는 의식과 간결한 춤사위를 통해 탄생을 기원했고 군무진들도 볍씨를 뿌리며 땅의 기운을 받아 움트는 생명의 탄생을 기원했다.
전체적인 구성과 움직임에 있어서는 아름답지만 감각과 형식, 진선미 중에서 미를 우위에 두는 유미주의(唯美主義)적인 특성보다는 무위의 정신과 내용을 충실히 담고 있었다. 내밀한 움직임과 역동적 움직임의 조절은 다소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공연을 능숙하게 이끌어갔고, 원형으로 한정된 동선이 단조롭게 보이지 않는 것은 무용수들의 절제를 동반한 다양한 춤사위의 연속 때문이었다.
이번 공연을 통해 국수호 선생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깊이와 정수를 보여주는 동시에 음악이 주는 감성, 소극장 공연도 충분히 대극장에서 볼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간 대작의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언급되었지만 작은 무대를 알차게 연출한 <무위>를 바탕으로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음을 관객들에게 각인시켰고 이는 작품을 대하는 안무자의 꼼꼼함과 철저한 준비의 소산이었다. 절제된 아름다움과 응집된 에너지의 표출, 자연과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 등이 빛을 발했던 무대는 연륜을 기초로 담백함이 진실함으로 다가오면서 앞으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기약케 했다.
글_ 장지원(무용평론가)
사진_ 디딤무용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