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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압도적인 춤, 아쉬운 디테일 - 김평수의 춤 〈Fifty minutes – 가득 찬 시간〉

 50분 내내 혼자 춤추는 일은 쉽지 않다. 작품 구성에서도 독무는 압도적 기량과 뚜렷한 서사가 뒷받침해야만 긴 시간을 끌고 갈 수 있다. 1124() 부산 민주공원 소극장에서 김평수의 춤 가득 찬 시간>이 무대에 올랐다. ‘Fifty minutes’50분 동안의 독무를 구상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혼자 주제를 표현하기에 충분한 시간 50, 이것이 공연 제목의 의미다.



 



 

  <가득 찬 시간>은 김평수가 수년 전부터 창작한 소품을 엮어 다듬은 작품이다. 기존 작품을 해체, 재결합하고 부분 창작으로 주제를 살리는 안무를 더 했다. ‘씨앗부터 새싹까지’, ‘’, ‘일기장’, ‘반성문’, ‘칠전팔기5개 단락으로 짜인 구성은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또 다른 봄에 대응한다. 관객이 등장할 때, 무대 중앙에는 빛나는 재활용 쓰레기 봉지 더미가 쌓여있다. 봉지가 꿈틀거리면서 춤꾼의 몸이 서서히 드러난다. 봉지는 하나둘씩 공중으로 떠올라 춤꾼의 머리 위에 떠 있다. 봉지 표면에 적힌 쓰레기 재활용이라는 글자는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재활용은 김평수가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탄생, 생애, 사멸 그리고 또 다른 탄생이라는 생명의 사이클과 관련이 있다. 쓰레기는 재활용으로 쓸모가 있는 다른 것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낸 작품의 주제가 씨앗부터 발아, 생애, 사멸 그리고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이라는 생명(생성)의 사이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지독한 자기반성의 반복이 담겨있다. 일기를 쓰고, 반성문을 쓰는 일은 자기 성찰의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반성은 쉽지 않은 자기부정이기 때문에 단번에 성공할 수 없다. 단지 반복할 뿐이다. 반복은 차이를 낳는다. 중요한 것은 반복이 생성하는 차이다. 생성(생명) 사이클의 핵심도 반복과 차이다. 각 단락을 소제목으로 구별해 두었지만, 관객이 춤으로만 단락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혼자 추는 춤은 그저 김평수의 춤이고 임의의 단락들은 아주 작은 차이만 보인다. 작품이 막바지에 도달해서야 관객은 작은 차이의 누적이 처음보다 얼마만큼이나 다른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 수 있다.

 

  김평수는 평소에 춤을 추고 나서 호흡이 남아있는 상태를 부끄러워했다. 호흡이 여유 있다는 것을 성심을 다해 춤추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 작품은 그의 평소 스타일을 보여주는 전형이다. 60분 동안 한 치의 틈도 없이 자신을 몰아친다. 커튼콜 때까지도 춤꾼은 호흡을 가다듬지 못했고, 서 있기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그제야 관객도 겨우 몰아 쉰 숨을 놓을 수 있었다. 자신과 관객까지 몰아치는 지독한 춤과 지독한 감상을 경험했다.





 

   지독하고 성실한 춤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방해하는 몇 가지가 있었다. 그중 비중이 큰 것은 공연 내내 조명기기 바로 밑에 떠 있던 밝은 비닐봉지다. 미세한 부분까지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소극장 무대에서는 소품 하나의 위치와 처리가 작품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발아한 씨앗이 무한 가능태로 부유하는 것을 상징하고, 봉지에 적힌 글이 직접적인 의미 전달을 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무대 장치이지만, 떠 있는 밝은 봉지는 보기에 불편했다. 봉지는 일상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놓았는데, 무대에서 소품이나 장치를 이용할 때에는 일상품의 느낌을 어느 정도 벗겨 내어야 한다. 외형에 변화를 주거나 질감과 색에 변화를 주는 등의 디테일이 모자랐다는 뜻이다


  또한 관객의 시선에서 계속 걸리적거리는 봉지의 빛이 조명의 조임 효과를 떨어트리면서 전체적으로 공간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조명 조임이 효과를 충분히 내었다면 단락 구분이 더 확실해졌을 것이고, 점진적으로 풀어가는 이야기의 전달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한 가지 더하자면, 작품 짜임이 조금 더 입체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강렬한 춤에 걸맞은 입체적 구성을 더한다면 작품 완성도가 한결 높아질 수 있었다.

 

   김평수는 60분 동안 춤을 추었고, 제목과 달리 늘어 난 10분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애초 시간의 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가득 찬 시간>‘50이 아니라 가득 찬 시간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막은 내렸고 춤이 끝났다. 이제부터 우리가 무엇으로 자신의 시간을 가득 채울 것인지 고민할 차례이다.

 

 

_ 이상헌(춤비평, 민주주의사회연구소 연구원)

사진제공_ 이인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