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푸리는 말 그대로 살을 풀어내기 위한 춤이다. 살은 이미 침범해 있는 액(厄)이고 이를 퇴치하기 위한 춤이니 살푸리는 과거지향적인 춤이다. 푸너리는 풍어나 행운, 혹은 풍요를 불러들이기 위해 추는 장단이고 춤이니 굳이 비교한다면 미래지향적인 춤이라고 할 수 있다. 경상도와 강원도 동해안지역에서 전승되어온 푸너리 장단이 ‘동해안별신굿’마당에서 무당이 무가를 부르기 전 연주되는 이유일 것이다. 2015년 시즌을 여는 장유경의 춤에 <푸너리 1.5>(2015, 2.24~5, 아르코 대극장)란 제명이 붙었다. 과거가 1이고 미래가 2라면 1.5는 그 한가운데 수니 현재를 말하고 삶이 1이고 죽음이 2라면 1.5는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의미할 것이다.
막이 오른 무대에 몇 개의 4각 벽이 중첩되어 세워져 있고 한 쪽 공중엔 흑녹색을 띈 커다란 소라모양의 구조물이 매달려 있다. 몸통보다도 커다란 하얀 꽃송이를 두건처럼 둘러쓴 여인들이 그 사이로 등장한다. 무대가 치워지고 검정색으로 몸을 감싼 박수무당(김용철)이 등장해서 천천히 무대를 누비기 시작한다. 연이어 붉은 장대를 둘러맨 남자무용수들이 나타나 무대를 휘젓더니 장대를 이어 지붕모양의 구조물을 형성한다. 이를 허문 후에는 다시 장대를 잡고 춤추는 모습이 노 젓는 어부들의 부지런한 뱃일을 연상케 한다. 그들이 허리춤에 숨겨둔 부채를 빼들어 차례차례 무대 위에 흩뿌리면 남녀 무용수들이 한 데 어울리는 활기찬 군무로 이어진다. 다시 등장한 남자무당의 익살스럽기도 하고 해학적인 춤사위들은 동해안별신굿에서의 마지막 굿거리인 ‘거리굿’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 같다. 장대를 든 남성들이 그의 몸을 장대로 굴려 무대 아래로 밀어낸다. 작품이 여기서 끝난 듯 객석 한 쪽에서 박수가 터진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갑자기 무대가 밝아지고 흰 옷의 무용수들이 두 명 씩 짝을 지어 등장하더니 한바탕 신나게 춤판이 벌어진다. 굿판이 끝나고 동네청년들의 축제가 시작된 것일까. 별신굿에서의 ‘노름굿’을 재현하려는 의도일까. 춤과 음악과 조명이 모두 바뀐 것이 전연 다른 작품을 보는 듯 하고 앞의 40분 무대 분위기와 단절된 이질적인 느낌의 20분이 길게 느껴진다. 천정을 바치고 있던 수백 개 장대가 와르르 쏟아진다. 천정도 함께 무너져 내리는 피날레는 인상적이다. 사라졌던 커다란 갯바위 혹은 소라모양의 청색 구조믈이 다시 등장해서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다.
<푸너리 1.5>는 2013년 창작산실 한국무용 우수작품으로 선정되어 초연(2014. 1.15, 아르코대극장)한 세 작품 중 하나로 2014년 우수작품재공연에 선정되어 다시 무대에 올랐다. 푸너리의 모티프인 동해안 별신굿을 좀 더 체계화하고 초연 시 주역인 장유경을 대신하여 새로 박수무당을 맡은 김용철을 중심으로 구성을 달리했다고 안무자는 말한다. 초연작을 보지 못한 탓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작품만으로 볼 때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째는 어제와 내일의 중간인 오늘, 삶과 죽음의 경계를 1.5로 설정한 연출자의 의도가 효과적으로 구현되었는가에 관한 의문이다. 1.5라는 시점 혹은 지점은 1과 2를 병렬로 늘어놓는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푸너리 1과, 2, 1.5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풍어제라고도 불리는 동해안별신굿의 마을 축제적 성격을 나타내기엔 조명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오케스트라 석에 마련된 국악기들이 라이브로 연주하는 푸너리장단은 시종 우울했다. 작품을 이끌어가도록 설계된 박수무당의 역할이 작품의 구심점이 되기엔 애매했다는 것과 중첩된 벽과 청색 구조물, 붉은 장대 등 무대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상징들이 관객들에 대한 공감을 얻기엔 설명력이 미흡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매력적인 소재를 가지고 공들여 만든 작품의도가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요소들 간의 부조화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초연 시 단 1회 공연에 그침으로써 원작을 보지 못했던 관객들에게 관람기회를 제공하고 원작의 감동을 되살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재 관람 기회를 주고자하는 것이 재공연의 의미일 것이다. 작품의 주역이 바뀌고 상당한 구성상의 변화가 있다면 이를 앙코르 공연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완성도를 높이고 싶은 욕심이 지나치면 작품이 개선 아닌 개악으로도 끝날 수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겠다.
글_ 이근수(무용평론가, 경희대명예교수)
사진_ 장유경 무용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