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 16일 부산민주공원 소극장에서 Dance Project EGERO(대표 강건, 이하 ‘에게로’)는 창작춤 <회귀>(안무 이용진)를 무대에 올렸다. 2014년 창단한 에게로는 존재와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다룬 여러 작품과 ‘회귀’에서처럼 소극(笑劇,farce)적 요소를 춤에 도입하는 등 창작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단체다.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었던 삶의 생채기를 마구 쑤셔 넣었던 가방은 어느새 감당 못 할 크기가 됐고, 여인은 가방 위에 주저앉아 현실에 닿지 못한다. 가방은 작품의 중요한 축으로 복합적 의미를 가진다. 갈등과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을 담고, 현실과 환상을 매개하고, 회귀를 갈망하는 이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여인이 마법사의 주문처럼 가방에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닦아 불어 날리면 시곗바늘이 된 춤꾼 세 명이 가방을 축 삼아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툭 치는 소리를 신호 삼아 극적 판타지가 시작된다.
안무자 이용진은 소극(笑劇,farce) 형식을 이용해서 판타지를 만들어 낸다. ‘회귀’에서 판타지는 감정적 리 얼리티를 강화하는 핵심 요소다. 주연인 김미란(부산시립무용단 부수석)의 연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만, 만약 그뿐이었다면 판타지는 효과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김미란은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하면서 캐릭터가 처한 혼란한 상황을 전달한다. 여기에 의사(이용진)와 간호사(정혜원)의 코믹연기가 더해지면서 진지함과 위트가 묘하게 뒤섞인 초현실적 상황을 만들었다. 무대 디자이너 김호진의 무대 세트는 이러한 비현실적 상황을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엮으면서 공간적 판타지를 완성한다.
꼭꼭 숨겼던 생채기에 대한 처방은 겨우 술 한 병이다. 소주 한두 잔만으로도 어느 정도 잊을 만큼 아픔은 일상과 어깨를 겯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아파했던 일들은 누구나 하나씩은 가진 생채기였다. 아픔은 나누고 조각낼 수 있었고 심지어 바람처럼 날려 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가방은 감당할 만큼 작아졌고 돌아갈 때가 됐다. ‘회귀’는 피안으로 가는 거창한 여정이 아니었다. 삶에 흔들리면서도 끝내 대지에 두 발을 디디고 서서 ‘새로운 지금’에 머무는 것이다.
‘회귀’의 숨은 의미는 ‘오마주(homage)’에 있다. 이용진은 선배들 춤의 감성을 오마주한다고 말한다. 그가 오마주하는 시기는 2000년 초반,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한 프로젝트형 그룹 ‘연분홍’의 전성기다. 연분홍 멤버들은 주제를 유려한 춤과 감성으로 세밀하게 풀어냈고, 이용진은 연분홍의 춤과 직접 접촉하고 그 감성을 알고 있는 마지막 세대다. 김미란을 주역으로 선택한 이유도 김미란을 통해 연분홍 시기의 표현방식과 감성을 재현하려는 의도다.
‘회귀’의 오마주는 존경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용진은 연분홍이라는 지역 춤 역사의 일부를 내면화했다. 가까운 시기 지역의 춤 감성을 창작 소재로 건져낸 것은 동시대 지역 리얼리티를 획득하려는 접근이다. 블랙홀 같은 중앙의 흡입력이 닿지 못하는 지점도 바로 지역의 디테일과 리얼리티다. 부산 춤 생태계는 소모와 소진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고리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부의 역사를 돌아볼 경황이 없다. 그렇기에 ‘회귀’에서 이용진이 보여 준 방식은 지금까지 부산 현대무용 판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이 부산 춤판에서 ‘회귀’가 지닌 중요한 의미 중 하나다. 또 하나의 의미는 ‘오마주’를 통해 부산 춤판의 세대가 바뀌고 있음을 알렸다는 점이다. 오마주는 작가가 예술적 자신감을 가진 상태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작품·시대 등을 대상으로 하는 방식이다. 선배 세대와 선을 긋고 그들을 소재로 한 ‘회귀’는 부산 창작 춤에서 30대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글_ 이상헌(춤 비평가)
사진제공_ 박병민(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