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공연으로는 6개 단체에서 6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공모공연은 한국의 발레 창작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가장 뜨겁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면에서 항상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데, 공모공연이 모두 소극장에 몰려 있는 올해의 라인업은 그 현재에 대한 가장 솔직한 모습이기도 했다.
다크서클즈컨템포러리댄스가 조현상의 안무로 선보인 〈Into the Silence〉는 스마트폰 중독이라는 문제제기에서 출발한다. 전 국민이 스마트폰 사용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IT 강국인 한국에서 매우 동시대적인 주제라 할 수 있으며 움직임에 대한 접근 역시 매우 신선했다.
다크서클즈컨템포러리댄스 〈Into the Silence〉 ⓒ옥상훈
그러나 주제에 접근함에 있어 ‘스마트폰 중독이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단절시킨다’라는 문제제기는 우리에게 얼마나 유효한가. 스마트폰 이전의 2G폰 시절에도 동일한 문제제기는 있어왔고, 비단 핸드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PC통신과 인터넷 시대 이후 이러한 문제제기는 줄곧 있어왔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제기와 상관없이 기술의 발전은 우리를 스마트폰 시대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의 사용은 현대인의 삶에 그토록 문제적인가? 스마트폰 시대 이전의 친밀함을 회복하는 것이 현대인의 당면 과제인가? 아니,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우리의 인간관계 안에는 친밀함이 있었고, 우리는 제대로 소통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침묵하지 않았는가?
〈Into the Silence〉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제목 그대로 스마트폰이 가져온 침묵을 보여줄 뿐이다. 안무가가 구현한 움직임 역시 스마트폰이 가져온 비인간화된 침묵에 특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이 가져온 인간의 상실을 고발한 이 작품은 얼마나 문제적인가.
보여주는 것이 문제제기 그 자체가 될 수 있던 시기는 지났다. 보여주는 것이 곧 문제제기가 되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다. ‘문제제기’가 목적이었다면 창작자가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 여태까지 남들이 지적해온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새로운 것이거나 그에 대한 보다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드러냈어야 했다. 그것이 아니라 보여준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면 그 보여주는 방식이 더욱 강렬하고 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세계를 한 걸음 진보시키는 일이다. 진보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문제에 대한 발견과 제기 방식에 대한 고민이 좀 더 필요해 보인다.
윤전일댄스이모션 〈The One〉 ⓒ옥상훈
윤전일댄스이모션의 〈The One〉는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라는 주제 아래 윤전일, 한선천, 박인수, 김원영 네 무용수의 춤을 하나로 모으고 배우 정영주가 노래와 내레이션을 맡아 춤에 질감을 더했다. 흰색 의상을 똑같이 맞춰 입은 무용수들은 똑같은 움직임을 하다가도 각자의 장르로 돌아가 발레를, 현대무용을, 한국무용을, 비보잉을 선보인다. 무용수의 기량을 확인시켜주는 한편 춤의 엇갈림과 어울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평소에는 표현하지 못했던 네 무용수의 아버지를 향한 쑥스러운 애정은 발성 좋은 정영주의 목소리와 만나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그리고 움직임과 수어의 결합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고조되던 감정을 클라이맥스에 다다르게 한다.
한국무용수 김원영을 제외한 윤전일, 한선천, 박인수는 모두 케이블티비 엠넷에서 제작한 〈댄싱9〉의 출연자들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움직임과 수어를 결합시킨 무대는 박인수가 이미 방송의 미션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바 있다. 당시 방송에서 보여준 작품보다 만듦새는 더 세련되고 깔끔하지만 무용수 각자의 장르 특징을 드러내는 움직임의 전개 방식이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내러티브의 흐름, 최종적으로 아버지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방송으로 송출된 2분여의 작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공연 프로그램북에서 당시 〈댄싱9〉 출연자들인 박인수와 김솔희, 김태현이 선보였던 작품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안무와 연출을 윤전일이, 조안무를 정지만이 맡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고 박인수는 출연진에만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방송 당시 청각장애인 아버지를 위해 안무에 수어를 엮어 마음을 전달하고자 했다던 박인수의 의도와 이 작품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유사성이 보이는 작품에서 오마주는 무엇이고 영감이나 영향을 받은 것은 어디까지인지, 창작에 있어 역할 분담은 또 어디까지인지, 공연 외적으로 설명이 더 필요한 작품이다.
프로젝트 클라우드나인은 지난해 서울문화재단 서울청년예술단 사업에 선정되어 초연되었던 김성민의 안무작 〈더 플랫폼 7〉을 선보였다. ‘플랫폼’이라는 선술집을 배경으로 네 명의 여자 무용수와 두 명의 남자 무용수가 출연하고 안무가 김성민이 장면 전환에 가담하며 감초 역할을 한다.
프로젝트 클라우드나인 〈더 플랫폼 7〉 ⓒ강희갑
입체적인 무대 사용이나 웃음을 이끌어낼 목적의 대화, 캉캉 댄서들을 연상시키는 여자 무용수들의 의상과 활발한 움직임, 여자 무용수들과 대비되는 남자 무용수들의 유머러스한 춤 등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매우 흥미롭고, 여섯 명의 무용수들로 솔로와 듀엣, 군무를 고루 보여주는 안무 또한 매우 영리하다.
그러나 장을 구분하기 위해 등장하는 자막은 오히려 작품을 감상하거나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역할을 하는데, 예를 들어 ‘2인의 도망자’라거나 ‘지옥의 용병’ 같은 캐릭터 소개는 무용수의 등장에 기대감을 더해주지만 그것뿐이며, 이러한 소개는 장면에 따라 달라지는 캐릭터들이 왜 굳이 의상을 통일해서 입고 있는지를 설명해주지 않아 관객을 이해보다는 혼란 속에 밀어넣는다(이를 의도한 것이라면 성공적이지만).
김성민의 안무에는 매 작품마다 스탠드 마이크를 잡은 가수 또는 노래하는 사람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작품에도 김성민 본인이 노래하는 모습으로 객석에 웃음을 전달한다. 눈길을 끄는 이 캐릭터가 갖는 주목도나 장면 전환의 효과는 확실하지만 그래서 이 캐릭터는 작품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안무가의 페르소나라면 주제도, 방향도, 콘셉트도, 스토리도 다른 작품에 이 캐릭터가 왜 반복해 등장하며, 또 등장해야 하는지, 그의 등장은 작품 속에서 어떤 의미인지, 한번쯤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올해로 아홉 번째 치러진 축제에 아홉 번째 참여하는 진기록을 세운 김용걸댄스시어터는 〈키스(Le Baiser)〉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봄의 제전’을 바탕으로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속살이 섞이는 행위인 ‘키스’를 재해석했다.
키스라는 행위에는 김용걸도 안무노트에서 말하고 있듯이 두려움, 질투, 허탈감, 황홀, 흥분 등과 같은 여러 복잡한 감정이 뒤얽혀 있다. 이러한 감정들은 마음 밑바닥에서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존재하며, 그 대상과 벌이는 치열한 싸움의 결과이기도 하다.
키스를 성애적 행위로 해석하고 여기서 행위의 두 주체가 벌이는 심리싸움을 읽어낼 때, 어쩔 수 없이 로맨스라는 장르의 문법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로맨스는 본디 사랑에 빠진 두 남녀(사실 이성애자로서의 남녀만이 아니라 연인에게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연애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커플을 가리킨다)가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벌이는 정복전쟁이며 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사랑은 전리품이라기보다는 영토에 해당된다. 전쟁에서 두 주체가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마음을 상대에게 내어주기 때문이다. 둘 다 자신의 마음이라는 영토를 잃었지만 상대의 마음이라는 새로운 영토를 얻게 된 것이다. 키스는 그 새로운 영토에 휘날리는 승리의 깃발이다.
김용걸댄스시어터 〈키스(Le Baiser)〉
무용수들은 키스라는 행위에 도달하기까지,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탐색한다. 탐색을 하는 동안 미지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이 교차한다. 무용수들이 팔을 뻗거나 흔들고, 발을 구르며, 달리거나 뛰어오르고, 서로를 각자의 영역으로 데려가는 것은 탐색의 과정이다. 군무진들이 에너지를 다 소진하려는 듯 격렬하게 움직이다 끝내 지쳐 쓰러지고 나면 행위의 주체들인 두 명의 남녀 솔리스트는 몸을 꺾어 키스하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마침내 전쟁이 끝난 것이다.
작품은 표면적으로 키스에 다다르기까지의 남녀의 심리싸움을 격렬하고 에너지 넘치는 춤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작품의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봄의 제전’이라는 난공불락의 음악에 대한 안무가의 도전이다. 작품의 제목인 ‘키스’에서 행위의 주체는 서로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로맨스의 두 주인공이 아니라 음표들을 거느린 작곡가와 움직임으로 무장한 안무가인지도 모른다.
신현지B프로젝트는 발레의 김주원, 한국무용의 이정윤, 현대무용의 이윤희 등 각 장르를 대표하는 스타무용수들이 한 자리에 모인 신작 〈콘체르토(Concerto)〉를 선보였다. 피아노와 첼로, 플루트 연주자들이 라이브로 음악을 연주하고, 무용수들이 그 음악에 맞춰 우아하고 절제된 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신현지는 작품 제목인 ‘콘체르트’가 ‘협력하다’와 ‘투쟁하다’라는 상반된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며 “무용수들에게 클래식 음악은 떼놓을 수 없는 동반자이자 넘어서야 하는 경쟁자”라고 이야기한다.
무용수들은 몸을 통해 때로는 음악과 조화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기도, 또 때로는 음악과 격렬하게 불화하며 엇갈림을 빚어내는 존재들인데, 이 작품은 안무가가 말했듯 그러한 무용수들과 음악의 관계를 보여주는 작품인 동시에 음악과 함께 무르익어가는 무용수들의 성장, 그리고 결국엔 우리들의 인생 이야기로 귀결된다.
신현지B프로젝트 〈콘체르토(Concerto)〉 ⓒBAKi
작품은 네 명의 어린이 무용수들의 무대로 시작된다. 어린 무용수들은 발레의 기본 동작들을 깔끔하고 성실하게 수행하고, 음악은 차분하게 이 움직임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어린 무용수들이 퇴장하고 성인 무용수들이 등장하면서부터 이 차분한 평화는 깨어진다.
이윤희, 김은실, 류형수가 솔로와 듀엣으로 쓸쓸한 고독과 회한, 그리움 등의 정서를 전달하며 감정을 한껏 끌어올리고 마지막 김주원과 이정윤의 듀엣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버릴 것처럼 부풀었다 꺼진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원점에서 음악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신현지는 음악과 무용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작품을 시작했지만, 그 질문의 답은 무용수의 몸짓이 그려내는 유려한 선의 아름다움은 무용수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며, 무용과 음악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는 인간관계와도 닮아 있다는, 결국 ‘인간’으로 되돌아갔다.
유회웅리버티홀은 지난해 예술의전당 기획공연으로 올려졌던 〈댄싱 발레리노〉를 〈라이프 오브 발레리노〉로 제목을 바꾸어 축제에 참가했다. 제목이 바뀌면서 작품의 내용 역시 발레리노의 춤에서 발레리노의 인생으로 초점이 이동했다.
유회웅리버티홀 〈라이프 오브 발레리노〉 ⓒ한필름
다수의 뮤지컬 작업에서 얻은 경험 때문인지, 유회웅은 기승전결이 명확한 스토리텔링 구조 곳곳에 유머를 집어넣어 객석의 웃음을 유도하고 출연자들의 실제 목소리를 작품 속에 삽입해 진정성 있는 감동을 꾀했다. 이제는 무대의 주인공으로 춤을 추기보다 다음 세대의 무용수들들을 가르치며 춤을 넓혀가는 것이 발레라고 말하는 김현웅이나, 방송댄서로 춤을 시작했다가 발레에 입문해 발레리노로 무대에 오르며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내는 이영철의 목소리는 그들이 보여주는 춤 못지않은 울림을 전한다.
작품에 함께한 김현웅과 이영철, 윤전일은 국립발레단에서 전막의 주인공으로 무대를 누볐던 최고의 무용수들이다. 작품은 발레리노의 애환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객석과의 거리가 가까운 자유소극장의 무대는 그들의 전성기 시절 화려한 춤보다는 내밀한 목소리와 작은 움직임을 보여주는 데 더 적합하지만, 유회웅은 목소리와 이야기 사이에 이들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는 춤을 배치해 이 작품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용수’의 인생임을 놓치지 않는다. 특히 김현웅과 윤전일의 듀엣은 이들의 호흡과 기량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글_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대한민국발레축제 조직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