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부터 8일까지 민주공원 소극장에서 열린 〈REFRESH〉(아래 ‘리프레시’)는 ‘3일간 3개 도시 9개 단체가 펼치는 작은 춤 축제’를 위한 민주공원 상주단체 Dance Project EGERO(아래 ‘에게로’)의 기획공연이다. 이 공연은 묵혀 둔 작품을 재생해 레퍼토리 화 하자는 의도로 기획됐다. 멀게는 2012년부터 2015년에서 2019년 9월 초연까지 9개 작품이 참가했다. 작품들을 관통하는 특별한 주제 의식은 보이지 않았지만 삶을 바라보는 미시적·거시적 시각의 차이가 대부분의 작품에 묻어 있었다.
떠다니는 먼지를 모티브 삼아 점점 확장하는 움직임이 신선하고 흥미로웠던 김영찬(29동, 괄호는 단체명)의 ‘먼지’는 초연 당시 대상화했었던 먼지에 자신을 투영시킨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했다. 자신을 한갓 먼지로 여길 만큼 자존감이 바닥인 그가 누군가를 만나고 품으면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일상적이고 때로는 격정적인 움직임은 작품 말미에 넓고 천천히 흐르는 강처럼 자유롭고 편안해진다. 김요셉(춤나 댄스컴퍼니)의 ‘창백한 푸른 점’은 다양한 인간 삶과 자연의 변화를 담은 움직임을 어둠 속 불빛과 대비시킨다.
여기서 거시적 시각은 어둠 속 불빛의 움직임이다. 춤꾼의 격렬한 움직임과 땀은 오히려 미시적이며, 거시적으로 수렴하면 창백한 작은 빛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주적 시각에서 하찮아 보이는 인간 삶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거시든 미시든 그것을 인식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이상훈(스트레인지 댄스 컴퍼니)은 ‘Flow’에서 소리(음악)에 반응하는 몸의 확장과 수렴을 통해 서사 없는 춤의 형식미를 보여준다. 춤의 근본은 세계와 직접 반응 하는 몸이다. 소리는 손끝, 발끝을 타고 전신을 감고 피부를 어루만져 움직임을 끌어낸다.
이주성(고블린 파티)의 ‘전라도’에는 독특한 시각이 묻어있다. ‘전라도’는 전라도 여행이 남긴 심상의 흔적이라서 굳이 전라도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자신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여정을 함께한 대걸레 자루 ‘봉숙이’와의 관계에서 인간과 사물의 구분을 넘어서는 관조적 삶의 경지를 엿볼 수 있다. 최우석·배민우(춤추는 프로젝트)는 ‘무의미한 이야기’에서 춤·사랑·관계의 심각함과 무게를 기분 좋게 비튼다. 이들의 엉성하고 천진해 보이는 춤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 있는 무의미’ 혹은 ‘무의미의 가치’가 담겨 있다.
이용진(에게로)의 〈Chain Reaction〉을 처음 봤을 때 몸이 춤을 껴안고 있었다. 호흡은 몸속 어느 지점을 떠돌고 춤은 드러나지 않았다. 3년 후 춤은 몸을 벗어나 있었다. 장작이 타오르는 것처럼 춤꾼은 춤으로 육신을 태우면서 세계와 깊이 소통한다. 춤이 사유의 순수한 이미지라면 ‘태어남은 성냥이 마찰로 인하여 불꽃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팸플릿 작품 소개 글 같이 〈Chain Reaction〉은 사유(마찰)와 이미지(불꽃)의 연속현상이다. 이언주(현대무용단 자유)의 ‘지독했던 오후’는 기억의 오류를 표현하기 위해 투명한 입방체를 이용한다. 크기가 다른 입방체들은 저마다의 기억이며 그것을 짜 맞추듯이 기억은 편집된다. 입방체의 투명한 벽은 기억이 실제에 닿지 못하는 한계이고, 그 한계는 벗어날 수 없다.
지난 6월 AK21 공연(초연)보다 작품의 밀도가 높아졌는데, 대극장에서 크고 무거운 장치를 옮기는 에너지 소모가 소극장에서 최소화되면서 춤이 드러나고 긴장이 증폭된 결과다. 적절한 공간과 소품의 무게·크기·구도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야겠지만, 초연에서 놓친 장점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삭막한 현실을 거주 불가능한 사막을 떠도는 여행자에 빗댄 ‘사막을 건너는 히치하이크’는 허성준(분실물 보관소)의 작품이다.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 여행자에게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이 심장을 녹이고 밤이면 뼛속까지 추위가 파고드는 사막은 구원이 절실한 불친절하고 야박한 곳이다. 아감벤은 ‘구원은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기에 있으며, 구원이 도래해도 모든 것은 그대로다. 아주 미세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안내서는 알아채지 못한 구원처럼 이미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안내서가 삭막한 현실에서 구원으로 이끌 수 있을지 걱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구성을 단순화한다면 주제와 결말이 더 선명해질 듯하다. 이종윤·이진우(POD 댄스프로젝트)의 ‘공차적응’은 두 사람이 탄 우주선이 새로운 행성-이인조 행성(Planet of Duo)-에 불시착하는 영상으로 시작한다. 그곳의 가혹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두 사람의 노력은 눈물겹다. 현실은 ‘이인조 행성’의 물리적 환경 못지않게 가혹하고, 현실에 불시착한 청년이 느끼는 고통은 기성세대보다 클 수밖에 없다. ‘공차적응’은 ‘아무 도움 없이 극한의 현실에서 살아남기’에 대한 씩씩한 비꼬기다. 2년 전 초연에 비해 춤의 격렬함은 덜하지만, 배경 설정 등 이야기가 분명해졌다.
〈리프레시〉는 작품 수준 못지않게 기획이 돋보이는 공연이다. 우리나라 춤판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젊은 춤꾼을 행사의 역사나 권위 같은 유인요소 없이 한자리에 모으기는 쉽지 않다. 좋은 조건 하나 없는 공연에 이들이 흔쾌히 모인 것은 기성의 권위에 기대기보다 자신들이 주도하는 역사를 만들고, 자신처럼 생각하고 춤추고 버티는 이들을 만나 동지애를 느끼고 연대하기 위해서다. ‘리플레시’는 잠자던 작품을 소생시키는 것에서 나아가 기성 춤판의 변화 양상까지 반영하는 결과를 낳았다. 지난 사흘간 새로운 세대의 연대가 부상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년에도 그 후에도 절대 작지 않은 이 ‘작은 춤 축제’가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글_ 이상헌(춤비평가)
사진제공_ 박병민(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