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내장(cataract)이라는 단어는 폭포를 의미하거나 창살로 가려진 문이라는 뜻의 그리스 어원 카타락테스(kataraktes)에 연유하고 있다.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자신의 백내장을 비밀스럽게 관찰해가는 에세이에서 백내장이 위에서 아래로 드리워진 차단막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왼쪽 눈의 내리닫이 창살은 걷혔다. 하지만 오른쪽 눈의 폭포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나초 두아토의 안무로 빚어진 발레 <멀티플리시티>는 백내장으로 눈이 먼 바흐의 환희와 어둠의 일생을 따라간다. 나초 두아토는 바흐의 비밀에 특별한 연대감을 표현한다. 예술가는 누구도 참여할 수 없는 비밀을 작품 속에 남기게 마련이다. 음악이 시대의 상투성을 끊임없이 넘어서고 스스로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비밀이 필요하다고. 나초 두아토의 무용수들은 이 ‘비밀의 어떤 무렵’에 복무하는 군무들이다. 비밀로 이루어진 수많은 물방울들처럼 그들은 흐르고 부유하고 악보 위에 서식한다. 무용수들은 발끝을 세워 항상 먼 곳의 비밀들을 응시하는 자들이 아닌가? 사람들은 비밀이 되기 위해선 특별한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비밀이 되기 위해선 마술이 필요하지 않다. 예술가의 삶과 작품이 비밀이 되기 위해서 그가 자신의 삶에 미리 마술을 준비해둘 리 없기 때문이다. 작품이 가지는 비밀은 삶이 헛것이 되어버리지 않기 위해 분투한 예술가의 흔적들이며, 무의미해지지 않기 위해 작품 속에서 스스로 피어난 고뇌들이다. 무용수들은 바흐의 삶에 묻어 있는 비밀들을 따라가며 자신들에게 들려오는 메아리를 쫓는다. 귓속에 찾아온 새를 따라가듯이, 창문에 피어있는 성에들처럼, 이슬이 빛을 머금을 때 가장 위태롭지만 아름답듯이, 무대는 요밀하고 단정하지만 삶은 하나의 특별한 우연성에서 비밀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투와 단호히 결연하고 외로운 오류들로 이루어진 자신이 하나의 비밀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듯이, 다리가 없어 내려앉지 못하는 새들처럼 그들은 흔들리기에 아름답다.
23곡으로 구성된 바흐의 메아리는 들려지는 음역대에서 보여지는 자의 감정으로 다시 환기되어 우리 앞에 놓인다. 무용수들은 바흐의 수많은 음표들이 되어 특별한 체액으로 무대를 흘러다닌다. 관객들은 무용수의 피부를 만질 수 없는 자들이며 땀방울의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군락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백내장이 걷히는 것이다. 여기에 무용수와 관객들의 은밀한 거리와 저인망이 놓여있다. 무용수는 무대에 오른 순간 스스로의 몸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용수들이 어디론가 건너가는 것을 바라보며 이 설명할 수 없는 체험 앞에서 관객들은 글썽거리고 멈칫하며 길을 잃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이를 교감이라고 말한다. 나초 두아토가 바흐와 서약을 한 비밀은 여기에 있다. 이 비밀의 내압 안에서 무용수와 관객들은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음악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무용은 들을 수 있는 체험이기도 하다. 음표들이 보이고 그들이 들려온다. 나초 두아토는 자신의 무용수들로 만질 수 있는 소리의 항해를 해왔다. 죽음과 환희가 공존하는 바흐의 음악에서 우리가 길들여졌던 평균율은 새로운 긴장과 매혹으로 다시 태어난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들의 음표들은 무용수들의 핏줄과 혈액으로 인해 새로운 이미지의 서식지로 모였다. 이 이미지의 서식지에 군생하는 그들을 하나의 발레단이라고 부르기 이전에 ‘물방울들의 체중’이라고 불러보는 것은 행운이고 귀한 일이 아니겠는가.
글_ 김경주(시인, 극작가, 드라마투르기)
사진_ 유니버설발레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