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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죄인인가, 발레로 옮겨진 장발장의 용서와 구원 - 댄스시어터 샤하르 <레 미제라블>

댄스시어터 샤하르의 신작 <레 미제라블>이 9월 23일과 24일 양일간 도봉구민회관에서 초연되었다. 코로나 2차 대유행으로 수도권 방역이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강화됨에 따라 실내 50인 이상, 실외 100인 이상 행사에 대한 집합 금지 명령이 내려지자 공연계는 다시금 예정된 공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등 혼란에 휩싸였다. <레 미제라블> 역시 개막 일정이 8월 29일에서 9월 15일로, 다시 9월 23일로 두 차례나 연기되는 우여곡절 끝에 초연을 올릴 수 있었다. 10월에는 노원문화예술회관으로 무대를 옮겨 노원구민들과 만날 예정이다.

 


 

<한여름밤의 호두까기인형>, <줄리엣과 줄리엣>, <지젤이 지그프리트를 만났을 때> 등 클래식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주목받아온 안무가 지우영이 이번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을 재해석해 발레 작품으로 만드는 어려운 작업에 나섰다. 해외에서 파리오페라발레단과 볼쇼이발레단이 롤랑 프티와 유리 부를라카의 안무로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를 발레로 옮겨 주요 레퍼토리로 공연하고 있는 것과 달리 『레 미제라블』이 발레 무대에 올려지는 것은 처음이다. 탄탄한 관객층을 갖추고 커다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연극과 뮤지컬에 비해 발레가 한 걸음 늦은 것은 남녀 파드되의 비중이 높은 발레 안무에서 애정관계 중심으로 각색하기 비교적 용이한 『노트르담 드 파리』보다 개심한 장발장이 서사의 중심에 위치하는 『레 미제라블』이 좀 더 까다로운 작업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명의 뮤지컬과 영화에서 분노한 민중의 노래인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크게 화제가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초유의 대통령 탄핵을 거치며 노래는 물론 작품 자체가 한국적 맥락 안에서 정치적으로 재의미화 된 바 있다(2016년 11월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주최한 5차 촛불집회에서 시위에 참석한 ‘시민들과 함께하는 뮤지컬배우들’ 40인이 이 노래를 부름으로써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은 프랑스 7월 혁명과 한국의 촛불시위를 잇는 민중항쟁의 상징가가 됐다). 그러나 지우영은 발레 <레 미제라블>에서 원작 속 장발장과 자베르를 중심으로 한 용서와 구원의 이야기에 보다 집중한다. 

 

이를 위해 중년의 장발장과 자베르에는 전 국립발레단 주역무용수 강준하와 한양대 무용학과 손관중 교수를, 젊은 장발장과 자베르에는 윤전일과 정민찬을 각각 캐스팅해 드라마의 밀도를 높이고 코제트와 마리우스에는 스테파니킴과 윤별을, 테나르디에 부인에는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김순정 교수를 캐스팅해 무게중심의 균형을 맞췄다.

 


 

발레보다 한 달 앞서 개막한 연극 <레 미제라블>이 60여 명의 배우들을 무대 위에 올려 다양한 인간 군상의 스펙터클한 쇼를 전개하는 것과 달리 발레 <레 미제라블>은 대사도 없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생략이 많아 연극에 비해 다소 불친절하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원서로 2,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원작이 두 시간여의 무대예술로 옮겨지는 동안 과감한 생략과 스피디한 전개, 풍부한 상징을 통해 몰입도를 높이는 한편 영화적 연출의 묘미를 보여준다.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구한 장발장이 파리의 하수도에서 자베르와 마주치는 장면으로 시작된 발레는 영화 플래시백처럼 빠르게 과거로 돌아가 탈옥을 시도하는 젊은 장발장과 그를 저지하는 젊은 자베르의 만남으로 이어지며 팽팽한 긴장감으로 객석을 조인다. 장발장의 개심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는 미리엘 주교는 영상으로만 잠시 등장해 은촛대를 전달해주고 사라지고, 팡틴 역시 전사(前事)가 생략된 채 미혼모가 되어 공장 직공에서 창녀로 전락해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 속으로 빠르게 돌입한다.

 

그러나 긴박하던 작품의 템포는 팡틴이 죽고 장발장이 테나르디에의 여관으로 코제트를 데리러 가면서 갑자기 늘어지기 시작한다. 테나르디에 부부의 딸 에포닌의 생일 장면은 디베르티스망에 해당하는 볼거리 위주의 춤이 펼쳐지는 구간으로, 작품 전반의 무거운 드라마 사이에서 잠시 쉬어가는 역할을 하는 데에는 손색이 없지만 테나르디에 부인 역을 맡은 김순정의 존재감 때문일까, 전체 스토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과할 정도로 긴 분량이 주어지며 작품의 호흡을 흐트러지게 만든다. 

 


 

소녀에서 성인이 된 코제트가 등장하는 2막의 연출도 초반에 비해 다소 덜컹거린다. 원작에서 마리우스는 왕당파인 조부와 대립하는 공화주의자로, 아베쎄 친구들인 앙졸라, 콩브페르, 쿠르페락 등과 교류하며 혁명가로 거듭나지만 발레에서는 코제트의 연인으로 입지가 좁아진다. 마리우스의 춤이 대부분 코제트와의 파드되에 치중해 있다 보니 코제트는 바리케이트 장면에까지 등장해 혁명에 가담한 연인과 애틋함을 나누는데, 윤별의 경직된 연기가 만들어내는 균열을 스테파니킴의 고군분투로 메꾸는 듯한 모양새다.

 

중반부에서 드라마가 헐거워지는 아쉬움은 있지만 시민군의 투쟁을 그린 바리케이트 장면과 장발장에 의해 목숨을 구한 자베르의 자살,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결혼, 장발장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후반부에 이르면서 작품은 다시 처음의 호흡을 되찾는다. 특히 바리케이트 장면에서 여성 시민군에게 깃발을 쥐어주며 혁명의 주체로 그려낸 것은 남성으로 대표되어온 혁명의 얼굴을 여성으로 바꾼 탁월한 연출이었다. 

 

오월 광주의 비극을 발레로 옮긴 <오월바람>에서 여성 인물을 여전히 ‘군홧발에 짓밟힌 가련한 존재’로 묘사한 것과 비교하면 여성 안무가이기에 가능한 해석이자 성취이고, 지난 5월 광주민주화항쟁 4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SBS 스페셜〉‘그녀의 이름은’ 편에서 시민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여성들을 ‘주먹밥’으로 상징되는 보조자가 아닌 운동의 주체로 재조명한 것을 상기하면 하위주체였던 여성의 역사를 다시 쓰는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은 전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후반부의 중요한 두 죽음, 자베르와 장발장의 죽음 장면에서 지우영은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대신 젊은 자베르와 중년 자베르, 젊은 장발장과 중년 장발장이 서로를 마주 보도록 만들었다. 일생을 두고 그들을 괴롭혀 온 자베르의 신념과 장발장의 죄를 돌아보게 한 것이다. 자베르의 신념과 장발장의 죄는 작품 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대립항인 동시에 동전의 앞뒤처럼 붙어 있는 한몸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젊은 장발장과 중년의 장발장은 은촛대를 든 채 나란히 퇴장하는 것으로 용서를 완성한다.

 


 

대중화라는 구호 속에 재미가 최고의 가치가 되어가며 묵직한 메시지를 담은 긴 호흡의 공연은 점점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용의 경우 관객의 인내심은 한 시간 이상을 버텨내기 어려우며 민간발레단에서 자체 기획으로 제작하는 2막 이상의 전막 작품은 연말 시즌 레퍼토리인 <호두까기인형>에 집중돼 있다. 댄스시어터 샤하르의 <레 미제라블>은 이러한 현실 위에서 감염병 위기라는 또 하나의 장벽을 넘어 도달한 값진 성취로 기억될 것이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댄스시어터 샤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