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을 따라 윤회하는 생의 뮤즈 - 정동극장 25주년 기념공연 <김주원의 사군자_생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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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극장이 개관 25주년을 맞이해 <김주원의 사군자_생의 계절> 창작 초연을 선보였다. 김주원이 무용수로 출연하는 것은 물론 제작 프로듀서로 참여했고, <포이즈(POISE)>, <투 인 투(TWO in TWO)> 등의 작품에서 김주원과 함께한 디자이너 정구호가 예술감독을 맡았다. 작곡가 정재일이 음악을 맡아 연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 이어 김주원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연극 <프라이드>, <킬 미 나우>의 작가 지이선이 대본을 썼으며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 연극 <렁스> 등을 연출한 박소영이 연출가로 참여했다. 안무는 아크람칸컴퍼니에서 활동 중인 현대무용가 김성훈이 맡았다.
사군자란 사계절을 상징하는 매(梅)·란(蘭)·국(菊)·죽(竹)을 군자의 덕목인 인(仁)·의(義)·예(禮)·충(忠)에 빗대어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명칭이 생겨난 것은 중국 명나라 시대이나 그 훨씬 이전인 송나라 때부터 시문의 소재로 자주 등장했고 여기화가(餘技畫家)들이었던 문인들에 의해 화제(畫題)로도 널리 사랑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송나라와 원나라의 영향으로 사대부화가 그려지기 시작하면서 조선시대에까지 이르는 사군자화의 오랜 전통이 자리 잡게 되었다.
시와 그림의 주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군자는 한국무용에서도 크게 사랑받는 소재로, 그 대표적인 작품이 최현의 <군자무>다. 화공이 여성으로 의인화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와 어우러져 춤을 추는 모습을 표현했다. 국립무용단은 2013년 <군자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묵향>을 선보였는데, 이때 연출을 맡았던 정구호가 김주원의 이번 공연에 예술감독으로 참여한 것이 눈에 띈다.
<사군자_생의 계절>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공연은 사군자에 대한 이야기도, 사계절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네 개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처럼 이어지는 무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인연’이다.
첫 번째 무대는 산행 중에 매화에 홀려 길을 잃은 승려와 나비, 두 번째 무대는 평생 검을 쥐고 살아온 무사와 검혼, 세 번째 무대는 숙청 위기에 몰린 망명 정치인과 무용가 부부, 네 번째 무대는 지구 밖으로 탐사를 떠난 우주비행사와 그의 죽은 아내의 이야기다. 시간과 공간, 존재를 초월한 만남과 이별 이야기 속에서 승려, 무사, 정치인, 우주비행사로 끝없이 윤회하며 김주원과의 인연을 이어가는 역할로 배우 박해수와 윤나무가 더블캐스팅 되었고, 무용수 김현웅, 윤전일, 김석주가 김주원의 춤을 뒷받침했다.
무용가로 등장하는 세 번째 무대에서는 김주원의 대사도 들을 수 있지만 전반적인 무대의 구성은 김주원의 춤과 박해수, 윤나무의 연기가 만나는 형식이다. 승려가 산에서 발견한 매화, 대나무 숲에서 무사의 검이 허공에서 그려내는 난, 공연을 끝낸 무용가에게 남편이 전해주는 국화 꽃다발……. 사군자의 모티브가 곳곳에서 발견되기는 하나 그보다는 최현의 <군자무>에 스토리를 새롭게 부여한 오마주 작품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춤과 연기를 이음새 좋게 엮어낸 공연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영상이다. 이제 영상은 무대 위의 움직임을 보조하며 공연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공연의 또 다른 출연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할과 비중이 커지고 있다. 이 공연은 무대 뒷면에 영상을 띄워 움직임의 배경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무대 전체를 반투명 막으로 감싸 출연자들이 영상 안에서 움직이는 듯 입체감을 배가시켰다.
공연은 무대 앞쪽에 홀로그램 영상으로 등장하는 우주비행사의 모습 뒤로 전생을 더듬는 듯이 승려와 나비의 만남으로 인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검은 산을 배경으로 날아다니는 흰색 나비, 녹색 대나무 숲에서 울부짖는 푸른 검혼, 온통 붉은색인 극장 객석과 무용가가 입은 붉은 드레스, 그리고 검은 우주를 유영하는 동안 희게 부서지는 빛 속에서 떠오르는 죽은 아내의 기억……. 국립무용단의 <묵향>과 <향연>에서 네 개의 장마다 주제가 되는 색채를 부여하고 이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켰던 정구호의 감각은 이번 공연에서도 여지없이 빛을 발한다.
춤과 연기의 조화는 아름답고 영상과 음악은 시청각의 감각을 한껏 끌어올리며 감정을 증폭시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아쉬운 대목은 김주원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제목에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은 이 공연에서 김주원이라는 아티스트가 어떤 의미인지를,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한 편의 공연을 제작할 수 있는 그의 위치를 시사하지만 실제 공연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다. 최현의 <군자무>가 화공이 중심이 되어 사군자와 춤을 추는 것처럼, 승려, 무사, 정치인, 우주비행사로 윤회하는 주인공(박해수, 윤나무)이 자신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승려의 분신, 무사의 검혼, 정치인과 우주비행사의 아내로 춤을 추는 김주원은 아름답게 대상화되어 주인공의 생에 영감을 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네 개의 이야기 안에서 김주원은 살아 있지만 결코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유일하게 살아 있는 채로 등장하는 세 번째 이야기는 최승희와 안막 부부의 실화에 극적인 각색을 덧입힌 듯한데, 자국에서 입지가 좁아진 무용가 아내를 위해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남편은 북한을 연상시키는, 정치군인들이 장악한 정계에서도 숙청 위기에 몰려 아내의 마지막 공연이 끝난 뒤 공연장 대기실에서 아내와 동반자살한다. 아내를 살해하고 나서 자신도 그 뒤를 따르는, 오스트리아 루돌프 황태자와 메리 베체라의 마이얼링에서의 최후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인연을 강조하느라 죽음을, 그것도 동반자살이라는 명분으로 아내 살해를 낭만화하고 그 낭만화의 재료로 네 개의 이야기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존재로 등장했던 여성의 죽음을 사용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장면을 마냥 아름답고 낭만적으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국립발레단에서 퇴단한 뒤로 김주원은 전막 발레의 주인공이 아닌 아티스트 김주원으로서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무대가 아니라 자신의 무대를 끊임없이 창조해가고 있다. 발레 무용수가 직업발레단의 단원 생활을 마치는 것은 곧 은퇴를 의미했지만 오히려 그의 세계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은 뒤 꾸준히 확장되고 있다. 그렇기에 발레 무용수의 전형을 거부하며 스스로 살아 있는 무대를 만들어가고 있는 그가 정작 무대 안에서 아름답게 대상화된 뮤즈로만 존재한 이번 공연이 남긴 당혹감은 결코 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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