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화가 조르주 루오(Georges-Henri Rouault, 1871년∼1958년)는 학대받고 가난한 사람들에 공감하고 권력자에게 분노를 표한 화가였다. 그의 공감과 분노는 깊은 종교적 성찰로부터 나왔다. 검고 굵은 선으로 쌓인 농밀한 색채의 인물화는 미술 교과서에도 소개될 정도로 잘 알려졌다. 이런 그의 그림을 우리나라에서 종교화로 해석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서구 미술계에서 루오는 자신의 작품 300여 점을 미련 없이 태워버릴 만큼 현실에 초연한 현대 미술의 성화(聖畵) 화가라 부른다. 루오가 믿은 것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느낄 수 있는 것뿐이었다.
판댄스 씨어터(아래 ‘판댄스’)는 김수현과 허종원이 부부로 연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결혼 전에도 각각 뛰어난 춤꾼으로 인정받았다. 한때 부산의 춤 공연은 허종원이 나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된다고 할 정도로 허종원의 춤꾼으로서의 가치가 대단했다. 또한 김수현과 허종원의 듀엣은 난이도와 호흡에서는 비교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판댄스는 이 부부를 중심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가면서, 〈Left behind(남겨진 자들)〉, 〈KAIROS〉, 〈RED DOOR〉 등 구원을 갈구하면서 삶을 성찰하게 하는 주제의 작품을 일관성 있게 발표했다.
지난 19일 부산 민주공원 소극장 무대에 올린 <가족의 역사>도 이러한 일관성의 선상에 있다. 애초 이 작품은 12월 초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 올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부득이 극장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부분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가족의 역사>를 감상하는데 극장 변경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군무의 힘과 전체적인 동선, 구도 등을 소극장 공간이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급하게 극장을 바꾸다 보니 중극장용을 소극장에 맞게 조절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작품 완성도가 떨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부분적으로 에너지 넘치는 춤 맛을 극대화하지 못한 아쉬움은 남았다.
<가족의 역사>는 판댄스라는 이름으로 춤꾼 한명 한명이 단체에 들어 온 날짜와 개인의 성격을 재밌게 표시한 영상이 배경 막에 보이고, 소개된 춤꾼이 등장하면서 시작한다. 그렇게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서 판댄스라는 가족이 시작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가족은 -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 식물까지 - 물리적인 만남으로 시작한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 ‘존재들’이 되고, 사회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가족 공동체가 된다는 의미다. ‘가족’이란 혈연, 혼인, 입양, 친분 등으로 관계되어 같이 일상의 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공동체) 또는 그 구성원을 말한다. 혈연은 가족의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가족의 역사>는 판댄스라는 자신들 공동체 이야기를 시작으로 가족을 확장하면서 가족의 본질을 향해 나간다. 다양한 캐릭터 설정, 일상 동작부터 난도 높은 동작까지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이야기를 풀고 조이면서 별다른 장치 없이 춤으로 작품을 끌고 나간다. 춤꾼에게 상당한 역량이 요구되는 움직임도 빈틈없이 해내는 것은 그야말로 가족의 힘이 아닐까 한다.
<가족의 역사>는 가족 된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족이 된다는 것보다 진정한 가족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공간과 시간을 가득 채운 춤으로 표현한다. 판댄스가 말하는 가족은 이런 것이다. “뒤틀린 몸, 상처 난 마음, 짓눌린 영혼. 오래된 병자, 앉은뱅이, 그에게는 단 하나의 소망이 있다. 걷는 것? 아니다. 나를 일으켜 줄 손길. 너와 나가 아닌 우리. 가족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풀어보면, 소외와 배제가 없는 공동체다. 모든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배제를 내포한다. 구성원이 아닌 자들에 대한 배제 없이 공동체가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몸, 마음, 영혼이 뒤틀리고 억눌린 자들, 배제와 소외의 대상, 공동체는 그런 존재를 배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포함한다.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 싫은 대상을 구성원으로 인정해야만 가능한 배제를 통해 공동체를 이루어 낸다. 자크 랑시에르가 말한 ‘몫이 없는 자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이런 대상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배제 없는 공동체는 불가능한가? <가족의 역사>는 답을 ‘나를 일으켜 줄 손길’에서 찾으려 한다. 루오의 말처럼 의지가 있다면 현실에서도 ‘느낄 수 있는’ 초월 말이다.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는 영상이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느낄 수 있는 초월의 의지가 거창한 것이 아니라 같이 밥을 먹는 식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족의 역사>가 판댄스의 앞선 작품과 비교해 변화한 점은 메시지와 작품 구성에서 보였던 종교적 갈구를 복합적인 은유로 감쌌다는 점이다. <가족의 역사>는 너무나 익숙한 가족을 주제로 삼아 결국에는 배제 없는 공동체를 고민하게 했다. 만약 한 시간 동안 쉼 없이 추는 춤을 보느라 미처 주제를 알아채지 못했다 해도 아쉬워하지 말자, 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