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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발레단의 전성기를 여는 서곡 같은 무대 - 광주시립발레단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같은 작곡가의 음악을 사용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흔히 ‘차이콥스키 3대 발레’로 함께 소개된다. 그러나 발레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백조의 호수>나 송년 인기 레퍼토리인 <호두까기인형>에 비해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그리 자주 공연되는 편이 아니다. 공연의 규모에 비해 드라마가 밋밋하다 보니 관객들의 선호도가 다른 두 작품만큼 높지 않고 세 시간이 훌쩍 넘는 프티파 원작의 공연시간도 관객들의 집중도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최근에는 두 시간 남짓으로 길이를 줄여 공연하는 추세다.

 

그러나 공연 빈도가 높지 않다는 것을 작품이 인기가 없기 때문으로 연결 짓는 것은 섣부른 단정이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주역과 솔리스트, 군무진에 이르는 무용수의 기량은 물론 의상과 무대세트의 완성도나 이를 뒷받침하는 재정상황 등 발레단의 공연 역량을 적나라하게 확인시켜주는 작품이기 때문에 나열한 공연의 구성요소들 중 부족한 점이 있다면 쉬 들통이 난다. 소위 ‘아무리 잘해도 본전’인 작품으로, 발레단이 자주 공연하는 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다.

 

 ⓒBAKI

 

 

부임 후 <백조의 호수>, <라 실피드>, <파키타> 등을 차례로 올리며 오랜 시간 클래식발레보다 한국적 창작발레를 제작하는 데 치중해온 발레단의 체질개선에 주력해온 최태지 예술감독에게도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어려운 도전이었다. 2017년 그가 청빙제를 통해 처음 광주 출신이 아닌 예술감독으로 발레단 운영을 맡게 된 뒤로 예산이 꾸준히 늘어나고 단원들이 충원되어 비로소 공연 제작이 가능해졌다. 공연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지만 코로나 팬데믹 상황은 공연 개막을 계속 지연시켰다. 지난 5월 예정되었던 공연을 7월로, 다시 10월로, 그리고 12월로 세 차례나 미루고서야(공연은 12월 18일부터 20일까지 3일간 4회차의 공연이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려졌다),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으로 두 칸 띄어앉기를 실행하느라 객석을 30%만 채우고서야 겨우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 부부 무용가 장운규(광주시립발레단 부예술감독)와 전효정이 재안무한 작품은 3막을 2막으로 구성하며 공연시간은 줄어들고 밀도는 높아졌다. 현대의 공연에서 대부분 생략되기 마련인 온 나라 안에서 물레바늘을 없애버리고 소지한 자를 처벌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고, 데지레가 숲에서 귀족들과 함께 사냥을 하는 장면 대신, (역시나 현대의 공연에서는 만나기 어렵게 된) 오로라 공주를 구하러 가기 전 데지레 왕자의 모험담이 애니메이션으로 삽입된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데지레가 페로의 동화 속 주인공들인 빨간 모자, 장화 신은 고양이, 파랑새와 플로리나 공주를 구해내어 이들이 결혼식 디베르티스망 장면에 등장하는 명분을 제공한다. 라일락 요정은 모험을 마친 데지레를 오로라가 잠든 성으로 안내하는데, 이때 배를 타고 가는 장면 역시 현대의 공연들에서 삭제된 것을 되살린 것이다.

 

이 외에도 오로라의 세례식에서 무대 뒤쪽 가운데 놓인 공주의 요람 곁을 두 명의 유모가 지키고 있고 왕과 왕비는 무대 오른쪽에 멀찍이 떨어져 앉은 배치라든지, 마녀 카라보스를 세례식 초청인 명단에서 빼놓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시종장 카탈라부트가 카라보스에 의해 모자와 가발이 벗겨지는 망신을 당한다든지 하는(이 장면을 마냥 웃으며 볼 수 있는지는 따로 논의하더라도) 캐릭터와 상황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세심한 연출을 볼 수 있다. 

 

다만 이렇듯 전개와 크게 상관없이 지나쳐버릴 수 있는 장면들도 신경 써서 연출한 것과 달리 정작 작품 내에서 갈등의 주된 원인이자 드라마의 핵심인 카라보스의 활약이 축소된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1막에서 저주를 내리기 위해 세례식에 등장할 때의 임팩트도 썩 강렬하다고는 보기 어렵거니와, 2막에서는 데지레가 오로라를 잠에서 깨우기까지의 과정이 애니메이션으로 묘사된 모험담 이후 귀환식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카라보스와의 마지막 일전이 생략되어 있다. 카라보스는 이미 패배한 채로 데지레가 무혈입성해 오로라에게 키스하는 모습을 괴로워하며 지켜볼 따름이다.

 

ⓒBAKI



 

회차별 캐스팅에서도 타 지역 관객들까지 염두에 둔 세심한 숙고가 읽혔다. 2018년 입단한 강은혜는 어느덧 수석무용수로 승급해 총 4회차의 공연에서 처음과 마지막을 든든하게 지켰고, 강은혜와 나란히 입단해 지난해에는 서울국제콩쿠르에서 3위를 차지한 강민지가 토요일 저녁 공연을, 국립발레단을 퇴단하고 경희대 교수로 부임한 김지영이 토요일 낮 공연을 맡았다. 김지영은 2019년 <파키타> 공연에서도 광주시립발레단과 함께 무대에 오른 바 있다. 김지영을 캐스팅함으로써 그의 전막 공연을 그리워하는 관객들에게 관람 동기를 부여하는 한편 서울을 위시한 타 지역 관객들도 그의 공연을 보고 당일에 귀가할 수 있도록 시간대를 토요일 낮공연으로 배치했다. 

또한 강은혜와 이기행이 주역을 맡은 1회차 공연은 유튜브에서 실시간 스트리밍 되어 전국 관객들과 만났고, 스트리밍 중계가 끝난 뒤 광주MBC 채널에 업로드 되어 제시간에 공연을 보지 못한 관객들도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비록 현장 공연에서는 원래 입장 가능한 관객들의 30%밖에 관람하지 못했지만 이처럼 유튜브 채널을 보완재로 동원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주역무용수와 발레단을 알리고 실제 관객으로 유입시키는 효과적인 전략이라 할 것이다.

광주시립발레단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올릴 계획이라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반가움보다는 우려가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클래식발레 대작들 중에서도 화려함의 정점에 있는 작품을 광주시립발레단이 예산이나 단원 수 등의 외적인 조건들을 돌파하며 과연 번듯한 프로덕션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프로덕션을 제작할 조건이 갖춰졌다면 출연자의 기량을 그에 걸맞게 끌어올릴 수 있을지 등 의구심이 먼저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광주시립발레단이 지역 무용단체라고 한 수 접고 바라볼 필요 없는 프로덕션 제작능력을 갖췄음을 확인시켜주는 무대가 되었다. 발레단의 전성기를 여는 서곡으로 손색이 없는 무대였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광주시립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