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현 안무, 노네임소수의〈BLACK〉(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2020.12.19.-20)은 꽤나 실험적인 시도를 보인 작품으로 기억할 수 있다. 특별한 무대장치 없이 움직임과 빛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무용의 본질에 가장 접근한 작품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서사구조보다는 심상의 표현과 일상의 예술적 반영을 몸짓으로만 풀어내는데서 그러하다.
이러한 시도는 이전 작품인 〈SILENTIUM(침묵)〉(2018)에서 미시적으로 드러났다. 이 작품에서는 무용수의 상반신에만 조명을 비추고 이에 따른 근육 변화의 연속적 관찰 속에서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20여분, 단순한 흐름 속에서 관점을 제한하였지만 오히려 이에 집중시키면서 보는 이의 사유의 폭을 넓혔다는 측면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BLACK〉은 〈SILENTIUM(침묵)〉에서 보인 신체의 제한적 변화 양상에서 집단화, 공간의 확장을 꾀하였고, 일정 서사구조 속에서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려 한 점에서 양가적 의미를 확보하였다.
이는 조명의 변화에 따른 움직임과 심리적 변화 양상의 확대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먼저 초반에는 입에 조명을 문 무용수 그리고 한 몸을 이루는 듯 한 다른 무용수, 두 명의 미시적 움직임이 강한 이미지를 전해준다. 이는 어둠 속 신체의 몸짓이 집중되다가 조명을 던지고 받는 행위나 집단적 몸짓 속에서 깊은 어둠의 심연 속의 실존적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이어 유동적인 길고 얇은 조명이 비추어지면서 앞서 부분적 움직임에서 무용수들의 전체적인 몸짓이 조망되지만, 느린 움직임으로 조명에 따라 단순한 동작과 직육면체에 억눌리거나 이를 힘겹게 안고 작은 의자에 앉은 행위에서 고립 상황에서 자아의 갈등이 그대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에 이어 다양한 몸짓 속에서 여러 삶들이 구현되는데 고정된 조명 속 줄에 매달려 제한된 움직임을 보이거나 큰 움직임 없이 이를 지켜보는 행위자 그리고 직육면체를 활용하여 심리적 행위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모습 등에서는 갈등적 양상이 배가 되어 나타난다. 이어 여러 행위가 다시 제한적 공간과 조명을 통해 축소되지만 강한 바람에 휘감기는 비닐 속에서 자유로움과 존재적 상황에 대한 순응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이렇게 〈BLACK〉은 공간과 빛 그리고 심리적 몸짓이 조화를 이루며 현대사회의 실존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는 어떠한 화려한 기교도 없고 오히려 지루하다 할 수 있는 단순함 속에서 긴장감을 일으킨다. 이는 블랙, 검정이 가지는 미정형의 깊이감에 따른 심층적 움직임에서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여기서 심층적 움직임이란 절제되어 있지만 진폭에 따라 느껴지는 감정적 깊이의 몸짓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작품은 머리 속으로 그려졌지만 실행하지 못한 수행성이 실험적으로 구현되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이는 조명, 빛에 따른 움직임이란 무용 공연의 기본적 특질을 조형적으로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원래 소극장에서 어울렸을 법한 창작의 발상이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펼쳐지며 주제의 폭이 넓어지며 관객에게 그리 어렵지 않게 다가왔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무대는 안무자가 의도한 바가 완벽하거나 세련되게 다가오지 못한 부분도 없지 않겠지만 토대적이면서도 실험 무대를 지향하는 안무가에게 창작의 틀을 확장하는 무대로 자리할 듯하다.
글_ 김호연(무용평론가)
사진제공_ 한국문화예술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