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아트센터에서 코로나로 인해 해외 공연을 직접 관람할 수 없는 국내 관객들에게 뜻 깊은 행사를 마련했다. 국제적 명성의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여한 대가들의 작품 5편을 필름으로 준비한 것이다. 이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의 일환 중 하나로 유일한 무용작품인 <체세나>가 4월 30일과 5월 2일에 LG아트센터에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상연되었다. 주한 프랑스대사관 문화과가 후원할 만큼 아비뇽 페스티벌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공연예술축제이다. 올해로 75회를 맞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축제는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참여로 예술가들과 관객 모두에게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체세나>는 벨기에의 현대무용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기여한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의 작품으로, 그녀의 로사스 무용단 역시 방한을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컨템포러리댄스의 선두주자인 그녀가 미니멀리즘과 내재된 강력한 에너지를 동반한 안무방식을 역시나 드러냈던 이번 작품에서 아비뇽 페스티벌의 상징적 무대인 교황청 안뜰 쿠르 도뇌르(명예의 뜰)에서의 공연은 과거의 시간과 오늘이 만나는 접점이 느껴졌다.
ⓒ Christophe Raynaud de Lage
상연이 시작되면 대형 스크린을 꽉 채운, 새벽 4시 30분 교황청 명예의 뜰이 보이고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그 공간에 나체의 남자 무용수가 등장해 라틴어를 암송하며 우리를 과거로 소환한다. 들숨과 날숨의 반복과 깊은 여운을 남기는 부르짖음은 원시성마저 담겨있었다. 바닥에 흰 모래로 그려진 원을 따라 회전하기도 하고, 안뜰의 성벽 돌을 정으로 때려 청명한 소리로 박자를 만드는 과정, 바닥의 모래가 쓸어 소리는 내는 움직임 등이 더해질수록 마치 진화의 과정을 극대화하는 것처럼 그려졌다. 이후 6명의 전문 아카펠라 가수들과 13명의 무용수들은 춤과 노래를 함께 진행하며 조화를 이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14세기 아비뇽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아르스 숩틸리오르를 중심으로 열 개의 시퀀스로 구성된 노래와 춤이 펼쳐지는데, 무용수들의 노래와 가수들의 움직임은 전문성을 떠나 서로에게 공감하며 이뤄졌다. 이들의 협력작업은 순수하며 진지하기에 울림을 갖췄다.
복잡하고 불규칙한 중세 유럽의 민속 음악들을 라이브 보컬로 들으며 절제된 움직임을 시시각각 변화시키는 무용수들 중에서도 두 명의 남녀 무용수는 눈길을 끌었다. 그들의 매력은 신체적 월등함이나 뛰어난 기량보다는 자체로 풍겨 나오는 아우라에 있었다. 이들 외에도 각 무용수들의 춤에서는 개성이 엿보였고, 서사 없이 해체된 움직임을 보여주는 과정은 집중을 요구했다. 특별히 <체세나>에서는 음악의 사용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는데, 불협화음부터 잘 정돈된 요하네스 치코니아의 “태양의 빛”, Caserta의 떠나게 해달라는 론도, Solage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관객들은 익숙하진 않으나 엄숙한 노래에 취해 마치 종교적 제의에 참여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 Christophe Raynaud de Lage
인상적인 부분은 여성들의 춤이 무심하게 이뤄졌으나 성별을 넘어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웠다는 점이다. 꾸밈없이 보여진 여성의 신체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이 있었고, 반복되는 움직임에서 밀도가 높았다. 최종적으로 인간의 죽음과 육신을 다룬 마지막 시퀀스는 인간다움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되새기는 시간을 제공했다. 투박하지만 진정성 있는 노래와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각자의 수용은 다양성뿐만 아니라 보편성까지 담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체세나>는 모든 관객들이 1시간 35분의 러닝타임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봤다고 하기에는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었다. 뛰어난 기량의 과시나 스펙터클한 무대장치, 화려한 조명, 자극적인 음악이 아니라 에너지를 응집한 가운데 정제된 음악 속에서 자연광에 맡겨진 자연스러운 인체의 움직임은 때로는 단조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또한 공연을 녹화하는 과정에서 클로즈업과 대상을 따라가면서 보여주는 장면이 다수이다 보니 분산된 동작이 주를 이뤄 제한된 화면이 아쉬웠다. 그러나 현장성을 그대로 담지 못한 상황을 배재하고 체세나에 담겨진 역사, 비오른 슈멜처의 감독 하에 구성된 음악, 무용수들의 고도로 정제된 움직임 등에 대한 고려가 더해진다면 진지하고 깊이 있는 작품이었다.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안느 테레사 케이르스마커의 집중력은 안무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라 볼 수 있었다. 특별히, 새벽에 시작해 해가 서서히 밝아오는 순간까지의 과정을 공유한 관객들은 그들의 노력에 감동하는 동시에 경계를 넘어선 컨템포러리댄스의 특성을 경험하였기에 이 공연의 의미가 더 크지 않았을까 싶다.
글_ 장지원(무용평론가)
사진제공_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