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포스트코리아
지난자료보기

로고

무용리뷰

공연비평

잊고 있던 꿈을 일깨워주는 휴머니즘의 세계 - 서울예술단 <나빌레라>

뮤지컬은 공연계에서 미디어 프랜차이즈 전략이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장르다. 특히 영화의 뮤지컬화는 무비컬이라는 조어가 생길 정도로 활발한데, 뮤지컬 인기에 힘입은 뮤지컬의 영화화 또한 못지않게 활발해지고 있어 관객들에게는 두 장르를 비교하며 감상하는 즐거움을 배가시켜주고 있다.

 

창작가무극이라는 명칭으로 라이선스 계약이 아닌 창작극 제작 중심의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울예술단 역시 이러한 미디어 프랜차이즈 전략에 맞춘 다수의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서울예술단의 작품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 만화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원작들을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특징인데, 창작뮤지컬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극장 무대가 여전히 유명한 라이선스 작품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떠올린다면 다양한 분야에서 관객들을 유인해 시장 확대를 꾀하는 매우 영리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2019년 초연된 <나빌레라>는 서울예술단이 <신과 함께>에 이어 두 번째로 웹툰 원작을 무대로 옮겨온 작품이다. 2016년 연재를 시작해 연재기간 내내 연재 랭킹 1위와 독자평점 1위를 놓치지 않은 원작의 화제성을 등에 업고 초연 당시 객석점유율 96%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올해는 tvN을 통해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또 한 번 흥행몰이에 성공하기도 한 작품이다.

 

 

가족 대신 브로맨스

 

초연과 비교해 많은 부분이 달라진 재연 무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작품의 방향성이다. 우편공무원 생활을 하다 은퇴하고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70대 덕출과 생활고 속에서 발레를 포기하고자 하는 20대 채록이라는 캐릭터의 뼈대는 유지되지만 서재형의 연출로 올린 초연이 발레를 매개로 한 가족의 휴머니티에 집중했다면 이지나가 연출을 맡은 재연에서는 발레를 통한 노년의 자아 찾기로 방향이 옮겨진다.

 

초연은 러시아에서 정상급 발레리노로 성공하고 돌아온 채록이 덕출의 가족들과 함께 밥상 앞에 둘러앉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유사가족의 완성을 보여주는데, 재연에서 가족의 정을 상징하는 ‘밥’이 사라진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이지나는 밥이 사라진 자리에 인생에서 한번이라도 날아오르고 싶었던 덕출의 꿈을 배치함으로써 이 이야기를 가족의 서사에서 노년에 자신의 인생을 되찾은 개인의 서사로 탈바꿈시킨다.

 

이 같은 방향성의 이동은 가족 구성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원작에서 덕출의 가족으로는 아내, 큰아들 부부와 손녀, 딸과 작은아들이 있고, 채록은 발레리나였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빚 때문에 따로 살고 있다. 초연 무대에는 비중의 차이는 있을망정 원작 속 가족들이 모두 등장한 데 비해 재연에서는 가족의 비중이 대폭 축소되었다. 덕출의 딸은 아예 등장하지 않고 며느리는 병원 장면에서 단 한번 등장했다가 대사 없이 퇴장한다. 채록의 가족은 더욱 단출한데, 어머니는 언급조차 없고 아버지 역시 채록과 전화 통화를 하는 장면에서 한번 등장할 뿐이다.

 

가족에 대한 서사가 축소되면서 채록은 드라마의 한 축을 이루는 주인공이라기보다 덕출의 최측근 조력자 정도로 비중이 낮아졌는데, 그 덕분에 오히려 덕출과 채록의 관계는 한층 끈끈해진 듯 보인다. 둘은 발레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는 동시에 치매를 앓고 있는 덕출의 비밀 또한 공유하며 가까워진다. 둘의 관계는 유사가족이라기보다 브로맨스에 가까우며, 이러한 브로맨스 구도는 이들 외에도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극의 중심 갈등인 발레를 배우고자 하는 덕출과 이를 자신의 체면을 깎는 남부끄러운 취미로 여기는 큰아들 성산의 대립, 죽음 직전 덕출에게 잃어버린 꿈을 일깨워주는 친구 만석, 방송국 피디로 덕출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그의 발레 도전을 응원하는 작은아들 성관, 채록이 발레를 포기하지 않도록 그에게 덕출의 레슨을 맡기는 발레단장 경국, 청소년 시절 채록으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축구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던 성철에 이르기까지, 인물 관계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갈등 속에서도 뜨거운 우정을 나누며 성장해가는 남성들 간의 연대다.

 

여성 캐릭터들이 서사가 거세된 채 조력자로만 머무르면서 이 같은 브로맨스 구도는 더욱 강화되는데, 영화계에서 성평등 테스트로 잘 알려진 ‘벡델 테스트’를 적용시켜보면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의 소외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극중에서 여성 캐릭터들끼리는 거의 대화하지 않고 이렇듯 진하게 마음을 나누며 정서적인 교류를 하지도 성장하지도 않는다. 원작 내용을 무대에 맞게 각색했을 뿐이지만 초연이 가족의 서사 중심으로 전개되어 이러한 소외가 다소간 가려지는 효과가 있었다면 등장인물과 그 서사가 간결해진 재연에서는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화려한 무대와 풍성한 춤

 

영상 디자인이 가미된 재연은 초연에 비해 시각적으로 더욱 화려해졌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덕출의 집과 그 동네에 비해 채록이 살고 있는 집이나 그가 아르바이트를 위해 뛰어다니는 골목은 매우 삭막하고, 청년실업 문제를 다룬 기사들이 채록의 고단한 하루 위에 겹쳐지며 그의 생활고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청년 문제임을 암시한다. 

 

덕출이 어린 시절 발레를 처음 접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이나 치매 증상이 악화된 덕출이 횡단보도 위에서 쓰러지는 장면, 눈이 내리는 날 덕출이 눈 속에서 발레를 하는 장면 등에서 영상과 조명의 어울림은 매우 아름답고,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역동적으로 이동하는 세트는 시야각을 더욱 깊고 넓게 만들어주며 무대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춤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것도 재연에서 눈에 띄는 변화다. 초연에서는 덕출의 회상 속 러시아 발레학원, 채록이 무용수로 있는 발레단 연습실, 후반부에서 함께 듀엣 공연을 펼치는 덕출과 채록의 무대 등 꼭 필요한 장면에서 최소한으로만 춤을 활용했다면 재연은 춤 장면을 대폭 늘려 보여준다. 춤의 장르도 발레에만 국한되지 않고 뮤지컬 안무와 현대무용 등이 어우러진 다양하고 풍성해진 춤을 감상할 수 있다. 덕출의 환상 속에서 펼쳐지는 군무는 고전 뮤지컬을 보는 듯한 유쾌함을 선사하는데, 군무진의 의상과 안무 등에서 영화 <라라랜드>의 잔상이 느껴지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덕출의 오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인 덕출과 채록의 듀엣 장면은 작품의 하이라이트로, 덕출은 치매가 점점 악화되어 안무를 다 잊어버린 상태지만 채록은 몸은 기억하고 있다며 함께 무대에 오를 것을 설득한다(이 장면은 2020년 BBC를 통해 소개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전직 발레리나가 <백조의 호수> 음악을 듣고 몸이 기억하고 있던 동작을 수행한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때 덕출과 채록이 대화를 나누는 공간은 다리막이 쳐져 있는 무대상수의 윙(wing)으로, 배우들이 무대끝선에 가까운 앞쪽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동안 다리막 반대쪽인 뒤쪽 무대에서는 극중 발레단원들의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들이 공연이 진행되는 무대 안쪽에서 출연자들의 대화를 엿듣는 듯한 효과를 내며 채록이 다리막 사이로 뛰어 들어가 덕출과 약속한 공연을 시작하는 순간의 감동을 배가시킨다.

 

 

발레에 대한 기존 프레임과의 충돌

 

궁정예술로 시작된 발레는 오랫동안 왕실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며, 신흥 부르주아들이 객석을 점유한 스타 발레리나 시대가 열린 이후 발레 흥행작들은 줄곧 아름답고, 젊고, 테크닉이 뛰어난 여성 무용수가 주인공인 작품들이었다. 프티파에서 발란신에 이르기까지 발레의 역사를 써내려간 안무가들이 모두 남성이었다는 점도, 니진스키나 누레예프 같은 걸출한 남성 무용수의 등장도 발레리나의 예술로 굳어진 발레의 조류를 바꾸지는 못했다.

 

   

  

70대의 은퇴한 노년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나빌레라>의 접근은 발레에 대한 기존 프레임과 전방위적인 충돌을 일으킨다. <나빌레라> 속 발레는 젊고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예술이 아니며,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적인 테크니션의 예술 또한 아니다. 배경이 되는 문경국발레단 역시 국립발레단처럼 안정된 대우나 대형 프로덕션 제작 등으로 무용수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단체가 아니라(결말에서 채록은 러시아에 진출해 무용수로 활동하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가 되어 금의환향하는데, 이때 국립발레단은 문경국발레단 시절과 대비를 이루기 위해 동원된 성공 코드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채록의 모습이 보여주듯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어 무용수들의 열정으로 지탱되고 있는 단체다. 부르주아의 예술이라는 선입견을 무색해지게 만드는 설정이다.

 

  

이러한 <나빌레라>의 모든 설정들은 마치 발레에 대해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는 모든 프레임을 분쇄하려는 시도로 보일 정도인데, 작품을 향한 뜨거운 눈물과 찬사는 이 시도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도달해 있는 곳은 발레리나가 아름답게 빛나는 무대가 아닌 우리가 잊고 있던 지난날의 꿈을 돌아보게 하는 휴머니즘의 세계다(이 휴머니즘의 세계가 발레리나가 아닌 비전공자인 노년 남성의 예술로서 발레를 비췄을 때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사실은 작품의 성공에서 따로 떼어내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취미로 발레를 배우는 비전공자들이 부쩍 증가하며 발레계에 새로운 활로를 제시하고 있다. 발레계에서는 오랫동안 ‘쉬운’, ‘친근한’, ‘즐거운’, ‘찾아가는’, ‘일상 속에 파고드는’ 같은 수식어를 동원하며 발레의 대중화에 진력해왔는데, 이러한 노력은 발레에 대한 낯섦을 지우고 장벽을 낮춰 잠재적인 관객들을 개발하려는 계몽적인 접근으로 일관되었다. 그러나 <나빌레라>의 성공은 관객들을 공연장으로 이끄는 데 필요한 것은 계몽이 아니라 감동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마음은 머리보다 먼저 움직인다는 것, <나빌레라>가 작품 안팎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바로 그 단순한 사실이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서울예술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