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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춤추지 않는 무대에서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일까 - 윤푸름프로젝트그룹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안무가 윤푸름의 신작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가 지난 8월 5일과 6일 양일간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공연’이라고 쓰긴 했지만 40여 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관객들이 무대에서 본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공연’이라고 부르는 출연자들의 약속된 퍼포먼스와는 달랐다. 윤푸름은 지난해 12월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선보인 <시간의 형태의 시간>에 이어 다시 한번 ‘춤 없는 춤’을 무대에 올렸다. 

 

 

물론 안무가와 출연자, 스태프들 사이에 긴밀한 약속이 오가고 출연자들이 그에 따라 움직이는 이것을 퍼포먼스가 아닌 다른 명칭으로 부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일반적인 공연과 다르다는 설명을 굳이 붙이는 이유는, 윤푸름이 이 무대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대에서 춤추는 몸을 걷어내고 났을 때 그 빈 공간에 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춤추는 몸이 없는 무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고, 또 무엇을 보아내야 하는가. 

 

‘춤 없는 춤’이라는 점에서 전작 <시간의 형태의 시간>의 연장선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전작이 큐알 코드를 통해 춤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며 관객들에게 춤이라 부를 수 있는 퍼포먼스를 제공했던 것과 달리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에는 그런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출연자들은 무대 위에 세팅된 장치들을 가동시킬 때나 등장할 뿐 관객들이 춤이 없는 무대를 공연 시간 내내 지켜봐야 하는 경험은 얼핏 두 작품을 동일해 보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에서는 전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의 무대 바닥을 열어 무대 아래의 빈 공간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검게 입을 벌린 무대는 “오늘 여기서는 춤이 추어지지 않습니다”라고 굳게 선언하고 있는 듯하다. 카메라와 조명기, 강풍기, 크레인 등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관객들은 그 사이에 끼어 앉은 모양새가 되어 춤추는 몸이 없는 무대에서는 무엇이 ‘발생’하는지 관람한다. 비어 있는 무대는 공연의 부가적인 요소들로 사용되던 사운드, 조명, 바람, 안개 등의 움직임으로 채워지며 주인공처럼 무대를 장악한다. 출연자들은 이 주인공들의 움직임을 돕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역동을 공연의 중심에 놓았다는 점에서 전작보다는 1950년대 발표된 존 케이지의 <4분 33초>나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흰색 회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4분 33초>나 <흰색 회화>가 관객들이 공연장 또는 전시장에서 감상하게 되리라고 예상했던 공연이나 작품이 없을 때 드러내 보이는 당혹감에 가까운 반응들, 즉 완성된 결과물이 아닌 허공에서 흩어지는 숨소리나 기침, 캔버스에 비치는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상 같은 것들을 즉흥 퍼포먼스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면 윤푸름의 작업에서 목격되는 역동들은 철저하게 그가 계산하고 의도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발생’이라기보다 ‘환기’에 가깝다. 

 

 

‘발생’처럼 보이도록 역동을 ‘왜곡’했다는 점에서 공연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나오는 안내방송이나 코로나 시국의 공연장 풍경을 녹여낸 체온계의 존재다. 윤푸름은 공연을 안전하고 정숙하게 감상하기 위해 덧붙여진 부가요소들을 본 공연 안에 삽입해 공연의 범위를 재설정하는 한편, 우리가 공연 관람 시 암묵적으로 동의해온 원칙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그는 <시간의 형태의 시간>에서도 입장 시 영상 안내가 나오는 비대면 큐알 체크인을 시도하거나 춤을 큐알 코드 속 영상 속에 심어 비대면으로 감상하게 하는 등 코로나 시국에 대처하는 공연장의 변화를 보여준 바 있는데, 이 작업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같은 요소들에 왜곡을 가해 우리가 지켜온 원칙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는다. 안내방송의 문장들에서 주요 단어들을 지워 공연이 시작되면 객석 간 이동을 금한다는 원래의 메시지를 뒤바꾸어 관객들에게 이동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거나, 체온계의 목소리가 정상 체온과 비정상 체온을 반대로 판정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 같은 왜곡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질문들을 이끌어낸다. 왜 우리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한 자리에 부동자세로 앉아 있어야만 하는가? 공연장 내에서의 이동 금지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인간의 체온은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또 어디부터가 비정상인가? 숫자로 치환된 체온으로 인간의 정상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이 질문들은 코로나 시국이라는 특수상황에서는 인간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온’한 성격을 띠기에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실천에 옮기려는 시도는 일찍 무산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코로나 시국이 종료되면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 안전한 위치에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을까. 어쩌면 윤푸름은 이번 공연의 제목으로 그에 대한 간접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도, 공간도, 움직임도, 그리고 인간도.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윤푸름프로젝트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