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벼랑에서 춤춘다(We all dance at the cliff).’ 본래의 제목인 <적(赤)> 보다 부제가 더 마음에 든다. 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인 최진욱의 안무 데뷔작이면서 2014~2015 시즌을 마무리하는 국립무용단의 레퍼토리 창작무용이다. 최진욱은 2001년 동아무용콩쿠르 대상 수상자로 수원대를 졸업하고 국립무용단에 입단했다. <묵향>, <토너먼트> 등 최근 작품에 출연하면서 조안무 역할을 맡았던 그가 선택한 테마는 욕망, 그것도 여인의 욕망에 관한 것이다. 작품의 모티브는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the Red shoes)』에서 따왔지만 미국에서 제작된 발레영화 <분홍신>(1948)을 닮은 스토리 전개다. 죽음 외에는 끊을 수 없는 춤에 대한 발레리나의 열망을 빨간 구두로 묘사한 마이클 파월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작이다. 최진욱은 먼저 귀족가문에서 자라난 여인, 연화(박혜지)의 억압된 욕망을 묘사한다.
막이 열리면 무대 가장 깊은 곳에 해먹처럼 떠 있는 하얀 욕조에 비스듬히 누워 밖을 내다보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세 명의 남자(조용진, 이석준, 이재화)가 길 위에서 춤추고 있다. 풍족한 집안에서 곱게 길러지면서 남부러울 것이 없지만 연화의 마음속에는 꿈틀거리는 욕망이 숨어 있다. 집에서는 꿈을 펼쳐낼 수 없는 현실의 한계가 그녀를 집 밖으로 끌어낸다. 남자들은 모두 매력적이고 독특한 개성을 지닌 춤꾼들이다. 극 중에는 예술적으로는 천사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악마이기도 한 남자(송설)가 있다. 여인의 욕망을 자극하여 안일한 현실을 일탈하게 하고 욕망의 끝에서 모두를 벼랑 끝에 서게 하는 주제의 상징성을 대표하는 가상의 존재다. 다섯 명 출연자 모두가 동아무용콩쿠르 입상자들이고 한체대를 졸업한 송설을 제외한 네 명은 모두 한예종 무용원 출신들이다.
무대 중앙을 X자로 가로지르는 일직선 위에서 외줄타기 곡예와 같은 위태로운 춤이 계속된다. 집을 뛰쳐나와 춤 대열에 합류한 여인은 리더 격인 적(赤, 조용진)에게 빠져들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위험한 춤 속으로도 빨려 들어간다. 현란하게 추어지던 4인무는 연화와 적의 2인무로 바뀌고 관능적인 춤은 정사로 이어진다. 나신을 연상케 하는 살색 타이츠는 푸른색 드레스를 거쳐 조명을 반사하는 갑옷 같은 황금빛 드레스로 바뀐다. 박승건의 의상은 여인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확장되어가는 욕망의 변화를 보여준다. 적의 의상은 붉은 색인데 흑과 백으로 명명된 이석준과 이재화의 의상이 모두 흰색으로 입혀진 이유가 궁금하다. 국립무용단 뛰어난 춤꾼들의 무대를 보는 즐거움이 있지만 춤의 구성에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남성 3인무에 여인이 합세한 4인무를 거쳐 여인과 흑, 여인과 백의 2인무가 여인과 적의 춤에 앞서 보여주었더라면 적에 빠져들게 된 논리가 자연스럽게 설명되었을 것이다. 2인무를 보강하고 송설이 추가된 5인무를 피날레로 추가한다면 45분에 그치고만 짧은 공연시간의 아쉬움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최진욱은 욕망의 주제를 선택하면서 <남극일기>를 통해 같은 주제에 익숙한 영화감독(임필성)을 연출가로 초빙했다. 영화를 보면서 욕망의 위험함이란 주제에 공감했고 무용과 상반된 영화 장르와의 협업에 도전해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영화음악으로 잘 알려진 모그(Mowg)에게는 음악을 맡겼다. 무용가의 춤과 함께 공연의 핵심을 구성하는 음악과 연출이 영화인에게 맡겨진 것이다. 음악은 춤과 겉돌고 춤의 구성이 치밀하지 못한 것을 보면 이러한 시도가 성공적인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무용작품에 경험이 없는 영화감독이나 디자이너 등 타 분야 전문가를 영입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대중화란 명제아래 협업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무용가가 작품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는 때문은 아닌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협업의 기본적인 전제는 안무가가 중심에 서서 그들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하고 외부 전문가들의 무용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선결조건이다. 무용가가 의존하는 만치 그들도 무용예술의 특성을 공부하고 존중해 주어야할 것이다. 무용관객은 그들의 실험대상이 아님을 인식해야한다.
글_ 이근수(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사진_ 국립무용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