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아트컴퍼니의 <타오르는 삶>이 지난 11월 18일과 19일 이틀간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올려졌다. 원로무용가 배정혜가 특별출연한 이 공연은 안무가 장혜림이 2019년 첫 선을 보인 <제(祭)>의 두 번째 버전이다.
2019년 3월 국립현대무용단은 한국-스웨덴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스웨덴의 스코네스댄스시어터와의 안무 교류 프로젝트로 기획공연 ‘스웨덴 커넥션 II’를 선보였다. 이 공연에 한국 파견 안무가로 참여한 장혜림은 스코네스댄스시어터의 무용수들 일곱 명과 함께 <제(祭)>를 초연한 뒤 11월에는 장서이와의 공동안무를 통해 여성 무용수의 2인무로 개작한 <제(祭) II>를 공연했다. 이듬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초청작으로 <제(祭) II>를 한번 더 공연한 뒤, 올해는 <타오르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일신해 다시 무대에 올렸다.
<타오르는 삶>은 <제(祭) II>에서 보여준 2인무의 움직임을 작품의 중심에 놓되 스승인 배정혜를 특별출연자로 무대에 올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있다. 제목이 바뀌게 된 연유를 짐작할 수 있는 배경이다. 초연과 재연에서 노동을 제의로 등치시키는 해석을 보여주었던 장혜림은 이번 공연에서는 제의가 된 노동의 총체로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장혜림이 안무의 모티브로 삼은 ‘번제(燔祭, burnt offering)’는 현대인에게는 종교적 상징으로만 남아 있는 낯선 의례다. 2018년 박옥수 목사가 펴낸 레위기 제사 강해 시리즈 중 한 권인 『번제』에는 번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양이나 소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기름을 취하고,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고, 그 모두를 번제단에서 불사르는 것이 번제다. 번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드리는 제사로, 제물의 머리와 가슴과 다리를 불사르는 것처럼 우리 생각과 뜻을 전부 버리는 것이다.” 박 목사의 해석처럼 인간의 생각과 뜻을 모두 버리는 번제 의식을 장혜림의 작업과 연결지을 때 삶은 노동을 태워 도달하는 최후의 숭고한 엘리시움이 된다.
노동이 된 무용, 무용이 된 노동
공연은 두 명의 여성 무용수가 무대 중앙에 자리잡고 앉아 한 손을 마주 잡은 채 다른 손으로는 팔을 뒤로 돌려 크게 원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용수들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목탄으로, 무용수 한 명이 몸을 뒤로 젖히고 한껏 팔을 뻗어 그려낼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곡선을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오면 다른 무용수가 그 움직임을 받아 같은 방식으로 곡선을 그리고 돌아오는 식이다. 움직임이 반복되는 동안 무대의 흰색 댄스플로어가 목탄이 그려내는 검은 선으로 점점 뒤덮이는 것은 물론 무용수들의 몸에도 검댕이 시커멓게 묻는다.
페인팅에 사용할 수 있는 여러 도구들 가운데 안무가가 굳이 목탄을 선택한 것은 여러 모로 상징적이다. 목탄은 질감이 부드럽고 다채로운 명암 표현이 가능하며 지우개를 이용한 수정도 쉬워 드로잉 도구로 가장 사랑받는 재료다. 따라서 목탄을 이용한 드로잉을 안무의 움직임 안에 편입시킬 때 기능적인 장점이 있는 한편, 목재를 태워 얻어지는 목탄의 제작과정은 ‘번제’를 주제로 한 안무가의 작업과도 맞닿아 있다. 목탄이 개입함으로써 시간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던 움직임은 무대 위에 기록된다. 역사가 된 것이다.
목탄의 검은 드로잉 위에서 펼쳐져 쌓이는 움직임들은 매우 아름답고 무용의 유려한 선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이미지들 또한 숭고한 감동을 전해주지만 한편으로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광산노동자가 착용하는 LED 조명이 달린 안전모를 소품으로 동원한 것이나 연주자가 내레이션에서 ‘노동의 시간’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관객들에게 노동이라는 주제를 이해시키기 위한 강박처럼 느껴졌고(불친절하고 어렵거나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는 무용 공연에서 ‘친절’은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요구가 되고 있어 이 같은 강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배정혜의 특별출연으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노동의 의미를 연결하고자 한 시도 또한 의도 전달에는 성공했을지언정 배정혜와 다른 무용수들의 춤의 연결이 썩 매끄럽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예술노동, 당사자의 목소리 듣기
사람들의 고정관념 속에서 예술과 노동은 오래도록 상호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 예술활동은 ‘창작’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가난해야 하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것은 손쉬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돈을 밝히면 제대로 된 예술을 할 수 없다’라는 공고한 편견 위에서 예술활동을 노동으로 인식하지 못한 채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일 또한 비일비재했다. 예술계가 ‘열정페이’로 대표되는 노동력 착취의 온상이 된 이유다.
따라서 예술은 노동을, 노동은 예술을 서로 아무런 교집합 없는 대상으로 바라보며 타자화해 온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술계 해시태그 성폭력 고발 운동과 미투 운동을 거치며 일어난 예술가들의 각성과 뒤이어 예술 현장을 덮친 코로나 팬데믹 상황은 예술이 열정과 재능을 동력으로 생산되는 값비싼 여흥이 아님을, 누군가에게는 삶을 꾸려가도록 해주는 생계활동이며 예술과 노동이 분리된 것이 아닌 ‘예술노동’으로서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했다.
그렇기에 이 같은 각성 이후에 무대에 올려진 장혜림의 <타오르는 삶>은 한국무용에서 전통으로 전승되어 온 의식무용과는 다른 결의 의미를 지닌다. 무용수는 노동자를 위한 제의를 치르는 사제로서 불려나와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을 태우는 당사자로서 무대에 올라간다. 공연 중반부에 배치된, 예술노동자로서의 경험을 토로하는 연주자의 내레이션 역시 이러한 제의의 당사자성에 힘을 불어넣는다. 이제야 스스로 노동자라는 발화를 시작한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어디까지 가 닿을지 궁금하다면 장혜림의 이 작품이 가는 길을 지켜보면 될 일이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99아트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