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춤프로젝트 ‘가마’(대표 한지은, 이후 ‘가마’)는 부산에서 활동하는 젊은 춤 단체이다. 2019년 부산 신진예술 페스티벌에 창작 춤 <진실의 변주>가 선정되어 호평을 받으면서 존재를 각인했다. 이런 ‘가마’가 지난 22~23일 <춤 Essay 展>을 부산민주공원 소극장에 올렸다. 이 공연은 창작 춤 <빛, 살, 숨, 결>, <은둔의 즐거움>, 〈re-peat〉
김연주 안무 <빛, 살, 숨, 결>
* 김연주 안무 <빛, 살, 숨, 결>(출연: 이녹양, 안혜연, 조아영, 김연주)
- 고민이 엿보이는 춤, 담백하고 명료한 구성미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 세대’로 불리는 이 시대 젊은이들은 이제 더 많은 것을 버려야 하는 ‘N포 세대’로 내몰리고 있다. <빛, 살, 숨, 결>에서 김연주는 ‘N포 세대’의 막막한 현실에서 희망 찾기를 춤으로 풀어낸다. 이 작품은 두 가지 분명한 장점이 있다.
첫 번째 장점은 구성이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 헤어나는 ‘빛’, 눈부시게 퍼져나가는 한 줄기 빛을 만나는 ‘살’, 그 빛 속에서 숨이 트이는 ‘숨’, 빛, 살, 숨을 모아 춤으로 세상을 밝히는 ‘결’까지 4마디 구성은 어둠처럼 막막한 현실에도 한 줄기 ‘빛’이 있다는 설정을 깔고 시작한다. 기·승·전·결식 구성으로 볼 수 있는 짜임이지만, 암울한 현실에서 힘들어하는 주제의 배경 설명을 최소로 하고 ‘빛이 있다’라는 결론을 먼저 던지는 두괄식으로 진행한다. 이러한 구성은 분명하고 깔끔하다. 각 마디에 4인무, 2인무, 독무를 변화 있게 배치해 명료한 구성에 춤의 풍성한 기운을 더한다. 두 번째 장점은 춤과 음악의 조화이다. 한국 춤에서 흔히 선택하는 음악을 비껴가면서 피아노 소나타와 한국 춤사위를 어우러지게 한 안무는 춤과 음악에 관한 관객의 고정 관념을 흔들기에 충분했고, 두 요소의 관계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켜 춤이 음악을 참조해서 이미지화하거나 음악이 춤을 지시하는 일반적인 관계 짓기에서 벗어난 감상을 경험하게 했다. 김연주의 안무는 무리하지 않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있고, 주제에 적합한 움직임을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다만, 4인무, 2인무에서 불필요한 구성의 긴장감이 남아있는 점은 고민해 볼 지점이다. 군집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림을 만들기 위해 움직인다는 느낌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 윤수양 안무 <은둔의 즐거움> (출연: 정서영, 정혜지, 윤수양)
- 무대 형식에 구애 없이 확산 가능한 경쾌한 수작(秀作)
사각의 빛에 갇힌 한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사각의 조명은 개인을 얽매는 틀이며 규정이다. 그 틀에서 존재자는 공동체에 적합한 개인으로 규격화되고, 개인은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잃은 채 살아간다. 그렇다고 무작정 공동체의 틀을 깨고 나올 수는 없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끊임없이 개인을 도구화하고 소비하는 공동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나를 지켜야 한다. 내가 뚜렷해야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무너진다면 관계는 지옥이다. 지옥 같은 관계를 감당할 수 없어 피하듯이 움츠리는 은둔은 ‘회피’다. 이런 은둔은 수동적이어서 즐겁지 않다. 소외당하기 전에 자발적으로 고독을 선택하듯 자발적 은둔은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윤수양이 작품 모티브로 삼았다는 신기율의 책 <은둔의 즐거움>에는 ‘자발적 은둔’을 사회적 가면을 써야 하는 무대에서 내려와 휴식, 질서, 희망을 찾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찾아오는 고독은 나를 깨어있게 하는 긍정의 감정이라고 제시한다.
<은둔의 즐거움>은 주제를 선명하게 풀어낸다. 춤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고 경쾌하다. 해학적인 몸짓과 일상적 동작, 세 춤꾼의 기우뚱한 균형은 무대 공간의 긴장을 느슨하게 한다. 단순하고 반복되는 북 장단에 간간이 끼어드는 관악기, 현악기의 멜로디가 자아내는 가벼운 중독성까지 모든 요소가 자연스럽다. 모티브로 삼은 텍스트가 제시한 ‘은둔의 즐거움’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한 해석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 작품은 도입부와 마지막 사각 조명 속에서 움직이는 장면을 조명 없이 상징적으로 처리할 방법을 찾는다면, 다양한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확산성이 충분하다.
* 곽민지 안무 〈re-peat〉
- 일탈을 꿈꾸는 차이와 반복의 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전통 사상에서 3은 중요하고 친근한 숫자이다. 대표적으로 ‘천지인(天地人) 사상’이 있고, 우리처럼 3박자를 음악의 기본으로 삼는 민족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일상에서 만나는 삼각형은 다른 모양에 비해 안정감이 크다. 안무자는 3을 안정적으로 보는 일반적인 생각을 따르지 않고 3을 불안하게 만든다. 안정적인 3은 ‘매일 같은 삶’이고 ‘지루한 일상 반복’이기 때문이다. <re-peat>에서 춤으로 풀어내는 3은 변화에 유연하다. 어떤 상태에 쉽게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3인무에서 둘은 같고 하나는 다르게 움직이거나, 각각 다른 동작으로 이질적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3은 기다리는 숫자이기도 하다. 하나를 더해 두 쌍의 짝을 이루고 싶은 기다림이 담겼다. 하지만 3은 4로 쉽게 나가지 않는다. 하나를 더해 4가 되거나 하나를 버리고 2가 되어 안정을 찾기보다 불안정한 역동성을 즐긴다. <re-peat>에서 3의 기다림은 틀 밖으로 나가는 일탈의 의미이고, 그 방법은 반복이다. 반복은 차이를 낳는다. 이전과 완벽하게 동일한 반복은 불가능하다. 미세한 차이가 쌓이는 반복은 결코 같은 곳, 같은 시간으로 회귀하지 않고 무한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re-peat>는 단순한 ‘반복’이 아닌 ‘반-복’이다. ‘반’과 ‘복’ 사이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반-복’으로 차이가 쌓이는 것은 반주 음악의 박자가 반복하면서 변주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춤과 음악으로 드러나는 차이와 반복은 후반부 Otros Aires의 노래에 맞춰 밝게 확산한다. 그것은 동일성에서 무한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개인이라는 동일성에서 타자라는 무한으로 나아가는 일. 그래서 <re-peat>은 일탈을 꿈꾸는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환대’의 무한 서사로 ‘반-복’하는 춤의 상상이다.
세 작품 모두 주제를 싸안고 씨름하기보다 가지고 논다. 좌절하고 있을 수만 없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상황을 김연주는 <빛, 살, 숨, 결>에서 대책 없는 희망으로 표현하지 않고 솔직 담백하게 풀어낸다. 사회라는 넓은 공동체를 느끼기 시작한 개인은 어느 순간부터 자기도 모르게 지치고 고갈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윤수양의 <은둔의 즐거움>은 이럴 때 고민에 빠지기보다 자발적 은둔으로 적극적으로 리셋하자고 말한다. 안정에 머물지 않고, 기어이 불안정을 갈구하는 곽민지의
<춤 Essay 展>은 20대와 30대 초반 세 사람의 발랄한 상상이 춤으로 이미지화 한 공연이다. Essay(수필)라고 했지만, Essay의 가벼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각하고 갑갑한 주제를 가볍게 툭툭 건드려 불필요한 중압감을 날리고, 암울함이 언제 걷힐지 불분명한 시기에도 춤이 여전히 중력을 거스르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글_ 이상헌(춤 비평가)
사진제공_ 한국 춤 프로젝트 ‘가마’ / 촬영: 박병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