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초연 당시 이미 수많은 호평의 세례를 받은 이 공연에 대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예술작품에서 ‘사랑’이라는 테마가 고갈되지 않듯, 사랑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쉽게 마르지 않을 것 같다. 좀처럼 재공연을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안무가 전미숙이 5년 만에 주요 출연진을 다시 모아 무대를 만들었다. 공연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하는 것이지만, 레퍼토리화도 은근히 기대되면서 이 작품이 좀 더 오랜 시간 회자될 조짐이 보인다.
일반 관객에게도 호평이 쏟아진 공연이지만 대중적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고, 다만 순정만화처럼 채색된 균형 잡힌 무대에 사랑의 희노애락을 펼치며 관객의 관심을 끄는 몇 가지 요소는 일부 관객의 미식가적 취향에 맞춰졌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게 만든다.
객석에서 한 남자가 하모니카를 불며 걸어 나오고, 무대에는 여자 무용수가 그림자의 형체로 천천히 등장하면서 공연이 시작된다. 시작 장면부터 관객의 몰입도는 상당히 높다. 관객의 집중이 거의 깨지지 않을 정도로 공연은 흥미진진하다. 무대의 삼면을 둘러싼 무대 장치의 벽에는 수많은 문들이 있다. 소통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여러 개의 이야기들을 구심점 없이 늘어놓을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준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공연에서 화제가 된 1000개의 커피 잔은 무용의 소도구로 한 개씩 등장하다가 나중엔 1000개가 모두 진열된다. 필자는 찻잔의 상징적 의미보다도 찻잔을 들고 춤추는 무용수의 소근육과 대근육의 세밀한 움직임에 더 관심이 갔다. 그밖에도 하얀 의상들, 치마를 입은 남자들, 소품으로 등장하는 그랜드 피아노의 의미 등은 안무가만이 고심하는 사랑에 대한 단상이 투영된 흔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춤의 기량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고, 풍부한 연극적 요소를 거뜬히 소화해내는 연기력도 찬사를 불러내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일상적 소재를 제법 묵직한 삶의 언어로 둔갑시키는 기술은 이 작품의 일미다. 철학의 무게에 짓눌린 현대무용에 숨통을 틔워주는 시원한 작품이었다. ‘사랑’의 단상들을 위트 있게 풀어내었고, 그 안에서 은근히 배어나오는 날카로운 메시지는 전미숙의 작품에서 피나 바우쉬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이 공연이 “동양적 감성의 탄츠테아터”라는 평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다.
연극적 요소가 춤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춤의 효용성을 위해 작용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의 새로운 방식은 어색하지 않았고 트렌드를 반영한 언어와 제스처는 사랑에 대한 동시대적 고민을 제대로 짚어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깨질까봐 조심스럽게 찻잔을 다루듯 불안한 사랑은 결국은 고전적 의미의 사랑에 머물고 만다. 춤의 감각은 현대적이지만 이 작품이 다루고자 하는 ‘사랑’의 양상은 지극히 고전적이다.
너무나 흔한 것이 사랑인 것 같지만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기 어려운 시대다. 순간적인 열정으로 폭발하고 마는 게 지금 이 시대에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대다수의 행위들이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 인간의 뇌는 정신질환자의 뇌와 유사하다는 실험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이성과 논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계산할 수 없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감정의 상태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정열과 광기의 다른 모습일 수 있다. 우리의 예술적 영감도 결국 사랑에 빠진 순간과 같지 않을까? 전미숙의 <아모레 아모레 미오>는 바로 그녀의 예술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글_ 서지영(공연평론가, 드라마투르기)
사진_ ⓒ김윤식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