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수 안무의 <소나기-잠깐 내린 비>는 2020년 청년연출가 작품 제작 지원 사업에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어 같은 해 11월 부산문화회관 중강당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이후 청년연출가 다년 지원에 선정돼 2021년 12월 23일 부산 북구문화예술회관에서 작품을 재구성해 공연했다. 이번 공연에는 김평수, 정혜원, 박준형, 김민찬, 이효은, 박지연, 최수연, 우정제 등 8명이 출연했다.
초연에서 탄탄한 구성과 독창적인 움직임, 상징적 장치를 적절하게 이용한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반면 주제를 풀어내는 데 공연 시간 85분이 다소 길다는 점과 잦은 암전으로 작품의 흐름이 끊긴다는 지적을 받았다. 1년 동안 작품의 장단점을 분석해 과감하게 재구성한 결과 공연 시간은 약 30분가량 줄였고, 작품 전체를 4쌍의 듀엣으로 끌고 가는 방식으로 변화를 주었다. 서사를 줄이고 이미지를 강화한 것이다. 서사를 줄였다는 말은 이야기를 세심하게 풀어간 초연과 달리 각 장의 이음 고리를 단순화해 줄거리를 모두 이야기하기보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필요한 부분만 제시했다는 의미이다. 강화한 이미지는 관객의 해석 폭을 넓혔고, 춤에 집중하게 하였다.
<소나기-잠깐 내린 비>는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모티브로 했다. 소설에서 소녀가 죽는 결말을 소녀가 죽지 않고 가족이 도시로 이주한 것으로 설정했다. 아들의 사업 실패로 고향으로 내려왔던 윤 초시네는 양평읍에서 가게를 차리려던 계획을 바꾸어 병약한 증손녀를 데리고 대처로 나갔다. 도시는 윤 초시네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짓밟았다. 가족은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고, 소녀도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찾아 나섰다. 냉정한 도시는 병약한 소녀에게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시골의 추억은 점점 흐리고 아련하게 잊혀갔다.
소년도 도시로 향했다. 황폐한 시골에서 젊은 그가 할 일은 없었고, 미래도 불투명했다. 소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도 가슴 한편에 품고 있었다. 도시에서 소년은 도시 밑바닥 곳곳에서 겨우 숨 쉬면서 욕망의 밑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소년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도시는 그들의 젊음을 끊임없이 소모했다. 자본이 만든 욕망의 성취가 손에 잡힐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허상이었다. 그들은 결코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되돌이표에 갇힌 것도 모른 채 지쳐가고 있었다. 소년과 소녀는 우연히 다시 만나 서로의 아픔을 나눈다. 잠깐 내렸던 비, 소나기는 그들의 삶에서 유일한 순수의 세례로 남아있었다. 현실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희망으로 다시 일어선다는 결말에 이르는 전개가 다소 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상투적이란 말은 익숙하다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소설 <소나기>에 동시대 청년의 현실을 투사한 이 작품은 소설과 달리 익숙하고 분명한 결말을 선택하였다.
초연에서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자세하게 표현했다. 프롤로그부터 이야기를 풍부하게 전개하고, 관객이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설명적 장면을 곳곳에 삽입했다. 그래서 작품이 길어졌고, 평자들은 그 부분을 지적했다. 이번 재공연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이야기의 고갱이만 남겼다. 이로 인해 전개가 빨라지면서 이미지 전환이 역동적으로 이루어졌다. 초연에서 소년과 소녀는 이 시대 힘든 상황에 부닥친 청년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설정하였고, 그 외 출연자들을 그들의 대표성을 뒷받침하는 익명의 존재로 표현하였다. 이번 공연에서 4쌍의 남녀는 각각 4가지 경우의 소녀와 소년이었다. 그들은 각각의 사연을 품은 존재로 익명을 벗어던진 당당한 캐릭터가 되었다. 작품은 서사의 압력을 벗어 던지고 치우침 없이 풍성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면서 초연과 아예 다른 작품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초연의 결점을 보완한 성과를 얻기는 했지만, 몇몇 부분에 아쉬움이 있다. 먼저 공간과 작품이 어울리지 못한 점이다. 이 무대는 작품이 내뿜는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는 공간이다. 공간의 협소함과 구조로 인해 퍼져 나가야 할 군무의 에너지가 갇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원하는 무대를 원하는 시간에 잡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서 이 문제를 전적으로 안무자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이 공간을 선택했을 때 작품과 공간의 관계를 한 번쯤 생각했어야 했다. 또 한 가지는 남녀 2인무가 메마르게 보인다는 점이다. 잠깐 내린 비 소나기라는 말의 뉘앙스는 감성적이고 아련한데, 춤은 강렬하기만 했다. 적어도 남녀 듀엣에서만큼은 더 감성적인 춤을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춤을 추는데 몰두해 감성적 표현을 놓친 것 같았다. 이는 움직임을 더하고 더하는 김평수의 안무 방식 때문으로 보인다. 춤꾼들은 엄청난 양과 난이도의 춤을 감당하는데 열중한 나머지 감성적 표현을 할 여유를 충분히 갖지 못한 것이다. 잘 추는 것을 넘어 표정과 동작의 섬세함으로 폭넓은 감성까지 표현하는 것을 고민했으면 한다.
대부분 일회성에 그치는 춤 작품을 재구성할 기회를 얻기는 흔치 않다. <소나기-잠깐 내린 비>는 드문 기회를 얻었고, 그것을 잘 활용했다. 이 작품은 탄탄한 구성에 충실한 방식으로 창작했다가 구성의 압력을 벗어난 경험까지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적절한 공간(무대)을 선택해 감정의 높낮이가 확연한 춤으로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 한 작품이 진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적지 않은데, 춤에서 그런 경우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글_ 이상헌(춤 비평가)
사진제공_ 박병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