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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블린파티 X 고물 <꼭두각시>


<꼭두각시>(2022.02.12.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공연)는 꼭두각시를 소재해서 만든 작품으로, 음악과 춤, 그리고 꼭두각시 곧 괴뢰(傀儡), 이 셋을 매우 잘 엮어낸다. 이 공연의 큰 매력은, 무용과 음악의 상호 긴밀성이다. 공연에선 일반적으로 음악과 무용은 공존하지만, 어느 쪽이 비교우위(Comparative advantage)가 될 수 있다. 어느 한쪽이 먼저 구상되거나 만들어져서, 그게 다른 쪽에 영향을 미친다. 음악에 무용을 맞추거나, 무용에 음악을 맞추면서 전개하는 게 보통이다. 


이 작품은, ‘무용에 의해서’ 음악이 조정되고, ‘음악에 의해서’ 무용이 조정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낸다. 재미와 의미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 


이게 궁극적으로 뫼비우스의 띠(Möbius strip)처럼 다가온다. 이른바 무용이 ‘갑’인 듯하고 음악이 ‘갑’인듯해도, 결국 갑과 을이 존재치 않는다. 그건 뫼비우스의 띠에서 안팎을 구분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음악과 춤을 병치(竝置) 또는 순환(循環) 시키면서 전개하는 작품을 보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다소 씁쓸하게도 느껴진다. 우리는 각자 갑을(甲乙), 주종(主從)을 설정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고 거기서 득실(得失)을 따지지만, 이 작품은 그런 것이 한낱 부질없는 ‘꼭두각시놀음’ 같다는 메시지를 넌지시 건넨다. 

 



이 공연은 현재로선 ‘고물’만이 할 수 있는 공연이다. 일반적으로 공연에선 무용의 역할과 음악의 역할이 확연히 나뉜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 무용을 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고물은 아니었다. 무대 한쪽에서 앉아서 연주를 하다가, 무대 중앙으로 이동해서 무용(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을, 매우 잘하고 매우 즐기는 듯 보였다. 마치 음악 안에 춤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우리도 ‘춤이 된다’는 ‘자랑질’처럼 다가왔다. 칭찬이라는 단어를 등장시킬 상황인지 모르나, 고물은 분명 칭찬에 칭찬을 받을 만한 존재였다. 

 

공연은 전반적으로 대칭 또는 데칼코마니를 생각하게 해줬다.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무용수가 악사 쪽으로 이동을 해서 펼치는 퍼포먼스였다. 무용수와 악사가 ‘한짝’을 이룬다. 여기서 주종(主從)관계가 성립이 되고, 한쪽이 한쪽을 조정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렇지 않거나 그런 게 무의미하다는 걸 보여준다. 보기에 따라선 주종관계가 반전(反轉)되는 희열 같은 것도 느끼게 한다.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우선 아이디어가 매우 좋았다는 점이다. <꼭두각시> 멜로디를 앞부분에서 잘 사용하면서, 음악과 무용이 조금의 모호함도 없이 매우 확연하게 메시지를 전달한 것은 물론이나,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전달해준 것에는 조명과 음향의 역할이 매우 크다. 이번 공연에 참여한 스텝에겐 더 큰 박수를 보내야 한다. 

특히 연주자가 연주하는 음악적인 소리뿐만 아니라, 여러 음향(효과)의 밸런스가 참 좋았다. 예를 들어서 연주자가 악기 케이스를 닫는다거나, (음악적인 樂音이 아닌) 작은 소음(騷音)이 빈번하면 관객이 쉽게 지치거나 집중하기 쉽지 않는데, 이 공연은 전반적으로 ‘사운드 디자인’이 매우 우수했다. 놓치는 소리도 없었고, 걸리는 소리도 없었다. 작품의 의미망 속에서, 이런 소리들이 모두 살아있고, 그 소리가 다음에 영향을 끼치면서 흥미롭게 이어졌다. 역시 ‘오영훈’이었다. 






대한민국에 좋은 음향감독이 많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현장에, 어떤 사람은 녹음에 적합하단 생각을 하는데, 오영훈은 이 둘이 모두 좋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이번 ‘꼭두각시’와 같은 공연에선, 오영훈의 또 다른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그의 역량이 공연계와 동종업계에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 생각된다. 


오영훈(음향)의 가장 큰 미덕은 자신(음향)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악기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소리를 가장 잘 아는 것이 오영훈이요, 큰 것은 잡아주고, 묻힐 것은 살려주는 것이 확실하다. 이게 참 기본인 것 같지만, 때론 이런 것들이 무시되거나 역량부족으로 인해서 밸런스가 깨지는 걸 들어왔다.


논문이나 공연을 보면, 그것과 관련자들의 ‘분석과 해석’을 알게 되거나, 관객의 입장으로서 그것을 찾으려고 애쓴다. 뭔가 없는 공연인데,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거나 들리는 공연에 지치게 된다.




<꼭두각시>는 달랐다. 이 공연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분석과 해석’이 확연하거나 없는 대신에, 대신 ‘꼭두각시’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분리와 해체’를 하면서, 거기서 의미망을 계속 흥미롭게 만들어 나아갔다는 점을 극찬한다. 그것이 전혀 어렵지도 않고 재밌다는 게 금상첨화(錦上添花)!  


이 공연은 초등학생도 볼 수 있다. 그들이 어쩌면 더 재밌게 볼지 모르겠다.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 공연은 재미있고 의미가 있다. 아, 잘 만든 공연(작품)이란 이런 것이다!



 

글_ 윤중강(음악평론가)

사진제공_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