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이 <춘향>으로 2022 시즌을 시작했다.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3일간 5회차의 공연이 올려진 곳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으로, 발레단이 이곳에서 공연한 것은 2017년 <돈키호테>를 공연한 뒤 근 5년 만이다. 5년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이번 공연은 국립극장과의 공동주최로 국립극장레퍼토리시즌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유니버설발레단 외에도 국립발레단, 국립오페라단, 서울예술단,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 등 외부단체들의 공연이 2021-22 레퍼토리시즌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올려진다.)
<춘향>은 2007년 유니버설발레단이 고양문화재단과 공동제작으로 초연한 뒤(1막 쇼케이스는 2006년) 2009년 한 차례 재공연하고 나서 2014년 창단 30주년을 맞이해 전면 개정한 버전으로 현재까지 무대에 올리고 있다. 음악을 만프레드 교향곡 등 차이콥스키의 곡들로 재구성하고 무대세트를 바꾸고 의상도 절반 이상을 새로 제작하며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한 작품은 2018년부터는 무대세트 대신 영상이 도입되는 등 공연이 올려질 때마다 꾸준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번 공연의 주역으로는 강미선⸳콘스탄틴 노보셀로프, 손유희⸳이현준, 홍향기⸳이동탁, 한상이⸳강민우 네 커플이 캐스팅되었는데, 출산 후 복귀 무대인 강미선, 초연 때는 향단으로 무대에 올랐다가 15년 만에 춘향으로 데뷔한 손유희나 역시 이번 공연이 춘향 데뷔 무대가 된 한상이 등 주역무용수들에게도 저마다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 무대가 되었다. 나는 한상이와 강민우가 각각 춘향과 몽룡으로, 이현준이 변학도로 분한 20일 낮공연을 관람했다.
ⓒUniversal Ballet Photo by Kyoungjin
드라마발레로 각색하며 놓친 것은
개정 후 세 번째로(해외 공연까지 포함하면 다섯 번째) 올리는 이번 공연에서도 상당수의 장면에서 안무 개정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춘향의 집과 몽룡의 집 분위기를 대비시켜 보여주는 첫 번째 장면은 양쪽 집안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두 주인공이 각자의 집에서 외출 허락을 받는 데까지 나아가며 이후 단옷날의 첫 만남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또한 몽룡의 아버지가 공부가 아니라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아들을 못마땅해하며 홀로 근심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던 여성 군무는 춘향과 몽룡의 이별 장면으로 옮겨졌다. 이 군무는 연인들을 갈라놓는 외부의 시련을 상징하며 이들의 감정선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등 군무의 완성도는 물론 내용 면에서도 짜임새를 더했다. 동시에 이 군무는 <지젤> 2막에서 재회한 지젤과 알브레히트를 훼방 놓는 윌리들의 군무를 연상시켜 안무가에게는 또 다른 숙제를 안겼다.
이 군무는 개정 전에는 <오네긴> 3막에서 오네긴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오네긴의 회한에 찬 심리를 대변하는 여성 군무를 연상시켰는데, 이 같은 유사성은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춘향>의 1막 하이라이트인 초야 파드되의 몇몇 장면은 <오네긴> 1막의 거울 파드되를 떠올리게 하고, 초야에서 몽룡이 춘향의 옷을 한 겹씩 벗기는 연출은 <카멜리아 레이디>의 3막에서 재회한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이 오해를 풀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블랙 파드되와 유사하다. 레퍼토리로 살아남은 유명 작품과의 비교는 후대의 작품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지만 클래식발레의 형식미를 따르는 것이 아닌 드라마발레로 스토리와 감정선을 안무에 반영시키고자 한다면 해당 스토리와 인물들의 감정에 대해 좀 더 치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고전소설 『춘향전』은 드라마발레의 원작으로 그리 좋은 텍스트는 아니다.
ⓒUniversal Ballet Photo by Kyoungjin
춘향과 몽룡이 첫 만남을 갖고 사랑에 빠져 백년가약을 맺고 이별을 맞는 1막의 전개에는 비약이 많다. 작중에서 몽룡이 남원 부사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생략되어 있는데, 그렇다 보니 둘의 이별은 몽룡의 아버지가 부사 임기를 마쳐서가 아니라 아들을 과거시험에 응시시켜야 하는 아버지의 의지에 따른 것이 된다. 그리고 이별의 원인이 이렇게 각색되자 두 주인공의 백년가약과 초야는 드라마로서의 동력을 잃고 하나의 파편화된 사건으로 극에 삽입된다.
관객들은 몽룡이 왜 밤에 집에서 몰래 빠져나와 춘향의 집으로 가 혼인을 청하는지(심지어 혼인을 청하는 과정도 생략되어 몽룡이 요청한 것이 혼인인지 초야인지도 불분명하다), 아직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아버지의 명령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으로 떠나게 되는 미래)를 알지 못하는 몽룡이 왜 그토록 혼인을(혹은 초야를) 서두르는지 이해할 수 없다. 월매가 왜 단신으로 온 몽룡에게 딸을 내어주는지, 어머니의 허락이 있었음에도 춘향은 왜 몽룡에게 불망기(不忘記)를 요구하는지(원작 『춘향전』의 이본(異本) 중 하나인 『남원고사(南原古詞)』에서는 춘향의 신분이 기생이기 때문에 뒷날 몽룡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 관아에 고할 증거물로 불망기를 받은 것이라고 적고 있다), 둘은 왜 정안수 떠놓고 맞절을 올리는 간단한 의식조차 없이 바로 초야로 넘어가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에 둘의 이별은 초야를 보내고 행복의 절정에 이른 연인들에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초자연적으로 찾아온 외부의 시련이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두 주인공의 비밀결혼이 해당 사건의 앞뒤를 어떻게 연결하는지, 이 비밀결혼이 극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차라리 아버지의 임지가 바뀌어 이별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안 몽룡이 비밀리에 혼인을 강행했다면 이별은 주인공의 행동을 좌우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어 긴밀한 드라마를 만드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첫 만남은 풋풋하고 초야는 사랑스럽고 이별은 애절하지만 그러한 각각의 감정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이정우 디자이너의 손에서 탄생한 의상들은 소재나 색상, 실루엣 등에서 무용 무대에 어울리면서도 양반과 평민, 관료, 기생 등 신분과 직업에 대한 고증을 살려 제작되었는데, 고증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다소간의 어색함이 있다.
두 주인공이 처음으로 만나는 단옷날 장터는 놀러 나온 젊은이들이 내뿜는 활기로 가득한데, 신분을 숨기고 지젤이 사는 마을에 찾아간 알브레히트와 달리 몽룡은 양반임을 숨기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사람들 무리에 섞여든다. 평민들 사이에서 홀로 도포 위에 푸른색 답호를 걸치고 있는 몽룡의 복색은 그의 신분에 대한 인장이나 마찬가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막 내내 몽룡은 복건이나 갓을 쓰지 않은 민머리로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놀이에 정신이 팔린 아들을 꾸짖으러 장터까지 쫓아온 몽룡의 아버지는 집에서나 쓰는 정자관을 쓰고 있고, 그를 장터로 안내해온 하인은 갓을 쓰고 있다. 춘향이 쓰개치마를 썼다 벗었다 하며 낯선 사람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달리 몽룡이나 아버지가 모자를 쓰거나 벗는 것은 안무 수행을 번거롭게 하는 장애 요소가 되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레단의 또 다른 레퍼토리인 <심청>은 복식과 관련된 고증 문제에 대한 좋은 레퍼런스가 될 수 있다.
ⓒUniversal Ballet Photo by Kyoungjin
캐릭터의 평면성이 드라마의 평면성으로
드라마발레로서는 톱니바퀴가 헛도는 듯한 1막과 달리 2막의 전개는 비교적 매끄럽다. 몽룡의 과거시험 응시와 장원급제, 어사 임관과 남원 파견, 신임 부사 변학도의 부임, 춘향의 수청 거부와 그에 대한 징벌, 변학도의 생일잔치에서의 파국, 두 주인공의 재회에 이르기까지 관객들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은 채 굵직한 사건들이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2막 초반 과거시험 장면과 장원급제한 몽룡이 어사로 임관되는 장면의 남성 군무는 해학과 힘의 적절한 균형을 보여주는 공연의 명장면 중 하나다. 시제를 어려워하며 머리를 싸매는 응시자들과 일필휘지로 답안을 써내려가는 몽룡의 대비는 매우 입체적이고, 합격자들의 위풍당당한 군무나 장원급제의 위엄을 뽐내는 몽룡의 화려한 솔로도 눈을 즐겁게 해준다. 그동안의 공연에서 변학도 역을 맡아온 강민우는 이번 공연에서 몽룡으로 데뷔하며 무르익은 기량과 연기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2막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장면은 어사라는 신분을 숨기고 비렁뱅이 꼴로 찾아온 몽룡을 보고 춘향이 옥중에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솔로였다. 이번 공연에 캐스팅된 네 명의 춘향 가운데 가장 키가 큰 무용수인 한상이는 자신의 신체조건을 십분 이용해 길고 유려한 선으로 옥중 솔로 장면을 더욱 애절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대미를 장식한 해후 파드되 역시 강민우와 좋은 호흡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완성되었다.
변학도 역의 이현준도 관록 있는 연기로 2막의 무게중심을 잡는 데 기여했다. 변학도는 <백조의 호수>의 로트바르트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카라보스 등과 같이 주인공과 대적하다 주인공에 의해 파국을 맞고 퇴장하며 권선징악을 완성하는 역할이지만 악역의 계보 안에서는 매우 시시하고 평면적인 악역이다. 원작에서는 탐관오리로 묘사되고 있지만 무대에서는 오직 춘향을 괴롭히기 위해 등장했다가 그 이유로 몽룡에게 봉고파직을 당하는 인물이다. 무용수에게는 운신의 폭이 좁은 역할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용수의 연기력에 따라 인물의 무게감이 달라지는 쉽지 않은 역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변학도 캐릭터의 평면성은 2막 드라마의 평면성으로 이어진다. 2막은 원작이 강조하고 있는 신분질서에 저항한 천민여성의 승리가 아닌 정절을 지킨 여성에 대한 남성의 구원서사로 마무리된다. 어사 몽룡은 변학도의 부정부패가 폭로되는 순간이 아니라 변학도가 춘향의 정절을 유린하려는 순간 등장해 그를 응징하고 춘향을 구해낸다.
변학도의 가장 큰 악행이 탐관오리로서의 부정부패가 아니라 춘향에게 수청을 요구한 것이 되다 보니 2막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장면은 춘향의 수난이다. 춘향은 변학도의 부임식에 불려나와서 한 번, 그의 생일 축하연에 다시 불려와 또 한 번 수청 거부에 대한 징벌을 받는데, 부임식에서는 변학도에게, 생일 축하연에서는 여러 명의 남성 고문관들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고문관들은 춘향을 괴롭힐 만큼 괴롭힌 뒤 망나니가 쓸 법한 칼을 꺼내 춘향의 목숨을 거두려 하는데, 이 연출 역시 폭력을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백조의 호수>의 로트바르트는 버전에 따라 오데트에게 구애했다 거절당하고 정복욕을 표출하는 역할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로트바르트가 어떤 버전에서도 오데트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춘향>에서 변학도와 춘향 사이의 권력관계를 보여주는 방식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로트바르트나 카라보스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진 클래식발레의 악역들이 무대에서 폭력을 보여주지 않는 반면 파드되의 비중이 높고 고난도 리프트가 많은 드라마발레에서는 주인공들의 감정이 격렬해지는 장면의 안무가 곧잘 폭력과 닮은 형태를 띠게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관객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굳이 보여주지 않고 관객들의 상상에 맡겨도 된다. 그것이 폭력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유니버설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