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은 바르지 않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바르지 않은 세상을 살아야 하고, 바르지 못할 운명을 깨달아야 하고, 바르기 힘든 관계를 감내하는 것이 안타깝다. 바르지 않은 세상을 이토록 잘 보여준 무대극이 있었던가! 국립창극단의 <리어>(3. 22 ~ 27. 국립극장 달오름)는 부정한 세상을 진정성으로 해독하게 만들어준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배삼식이 각색했다. 창극 <리어>는 ‘읽는’ 창극이다. 대본 자체로 훌륭하다. 읽어가는 창극이요, 읽어지는 창극이다. 이를 통해서 세상을 저마다의 눈으로 보게 만든다.
지난 10년간, 창극이 매우 발전했다. 배삼식과 고선웅이란 대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배삼식은 체(體)의 작가요, 고선웅은 용(用)의 작가다. 배삼식은 사유적이고, 고선웅은 실천적이다. 배삼식에게선 생각이 읽히고, 고선웅에게선 행동이 보인다. 배삼식은 깊고, 고선웅은 넓다. 배삼식의 대본은 문학적이고, 고선웅의 대본은 영화적이다.
배삼식은 ‘읽는’ 대본으로서의, 작품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그것 자체로서의 품격
이 있다. 고선웅의 대본은 ‘보는’ 대본이기에, 작품으로 만들어졌을 때 의미를 지닌다. 고선웅의 대본은 때론 격(格)을 느끼기 어렵다. 이건 그가 결국 체(體)보다는 용(用)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배삼식의 대본이 나열(listed)을 통한 지적인 심화(deepen)를 지향한다면, 고선웅의 대본은 이야기의 압축(compact)과 비약(skip)의 넘나듦이 탁월하다.
2.
창극 <리어>는 정영두 연출이다. 판소리에 기반한 음악극 <적로>처럼 배삼식과 정영두가 만났다. 정영두의 연출에는 좋은 점이 확실하다. 공간의 활용이 좋다. 지난 <적로>에선 돈화문국악당이란 작은 무대에 5인의 악사까지 배치하면서도, 장소가 협소하다는 느낌을 전혀 들지 않게 했다. <리어>의 무대는 훌륭했다. 대한민국의 대표 무대미술가 이태섭의 작품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무대가 아닐까? 배삼식의 대본이 지향하는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의 노자 사상을 무대미술이 살려주었고, 이런 무대를 고민한 연출에게 박수를 보낸다.
정영두 작품에서 자타 공히 인정하는 것이 배우의 움직임이다. 춤을 전공했던 것을 십분 살려서, 무대 위의 배우의 움직임에 의미를 만들어낸다. 특히 이번 작품에선 코라스의 활용이 대단했다. 판소리적인 합창과 군무의 움직임만으로 깊게 전달되는 것이 많았다. 반면, 연출의 한계도 숨기지 못했다. 1막의 흐름은 생기있다. 2막의 흐름은 지루하다. 왜 일까? ‘읽는’ 대본 자체로 흘러가야 하는데, 거기에 뭔가를 덧붙이려 하고 있다. 영화, 드라마, 웹툰에 익숙한 세대일수록, 더 그럴 수 있다. 고전일수록 더욱 앞으로 차고 나가야 하는데, 연출은 상황을 설명하려고 관객을 붙잡는 형상이다. 비교컨대, 2막이 고선웅 연출이라면, 확실히 시간을 단축하면서 임팩트가 확실한 장면을 만들어냈을 거다.
1막은 훌륭하다. 마치 흑백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전달되었다. 흑백영화의 ‘고급진’ 매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빛(white)과 그림자(black)의 조화에 있다. 정영두가 연출한 리어는 너무도 어둡다. 정영두는 비극을 너무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무대는 시종 어둡다. 무대 바닥의 물을 잘 살리기 위해서 그랬을까? 판소리와 물소리에 집중하라고 그랬을까? 2막의 중간쯤이 되면 모든 연출적 장치가 다 드러난다. 무대 또는 연출적 관심은 반감된다. 글로스터(유태평양)가 눈이 멀게 되는 장면에서의 붉은색은 앞의 어두운 흑색을 반전시키기엔 너무도 약하다. 시각적인 장치는 힘을 잃거나, 무시되고 있다.
3.
창극 <리어>를 통해서, 요즘 창극을 음악 면에서도 확실하게 말하려 한다. 이 글을 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요, 평자로서 준엄하게 꾸짖어야 할 지적이다. 요즘 창극엔 왜 이토록 건반이 과할까? 정재일이란 음악가를 존경한다. 센스가 있다. 그러나 창극에 있어서의 작곡과 건반은 주(主)가 아니다. 판소리를 더욱 살려내기 위한 부(副)이다. 창극 <리어>의 어느 부분에선, 으뜸(主)과 버금(副)의 자리가 바뀌었다. 주객전도(主客顚倒)에 객반위주(客反爲主)다.
유태평양과 김준수가 만들어내는 인간적 고뇌의 절창(絶唱)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배우의 호흡까지 충분히 느끼면서 감동을 받고 싶었는데, 시종일관 감초처럼 끼어드는 건반소리가 내겐 때론 경망스럽기까지 했다. 이소연과 왕윤정의 장면에선 어떠한가. 윤리적 측면에선 악녀(惡女)의 표본이 되겠으나, 다른 측면에서는 공감도 하게 되는 ‘판소리를 통한 여성서사’를 건반이 개입을 하면서 마치 대중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락시켜버렸다.
한승석의 작창(作唱)에서의 가장 주목할 점은 ‘코라스 판소리’이다. 국립창극단의 <흥보展>(2021)에서도 판소리 합창의 뛰어난 장면이 있었다. 그 때는 다른 소리가 크게 개입을 하지 않아서 살았다. 전통판소리 <적벽가>를 시작으로 해서, 판소리합창이 보다 높은 예술적 지점을 향하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코라스만의 좋은 앙상블이 몇몇 군데가 있었음에도, 거기에서도 건반이 필요 이상 개입하고 있다. 비유컨대 그레고리언성가와 스님의 범패가 그것 자체로 완벽하고 그 안에 ‘비움의 미학’이 있는데, 거기에 매우 대중적인 신디사이저와 화성을 붙여놓고 좋아하는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판소리의 어법에 청중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익숙한 선율과 화음으로 덧칠했다고 항변을 할 것인가?
4.
판소리 <수궁가> 중 ‘수궁풍류’ 대목이 있다. “왕자진(王子晋)의 봉피리, 곽처사(郭處士) 죽장구 쩌지렁쿵 정저쿵 석연자(石連子) 거문고 설그덩 둥덩덩, 장자방의 옥퉁수 띳띠루 띠루 띠루. (중략) 채련곡(採蓮曲) 곁들여서 노래할 제 낭자한 풍악소리 수궁이 진동한다.” 국립창극단에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판소리가 좋아서 가지만, 창극 반주 특유의 ‘수성가락’이 좋아서 간다. 국악관현악단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요, 무대 위 민속악합주에서도 이런 소리를 듣기 어렵다. ‘귀명창’이 좋아하는 창극 특유의 반주음악이 있다. 특히 이는 국립창극단이 최고다. 수궁풍류에 등장하는 석연자가 최영훈이요, 장자방이 이원왕이다.
창극 <리어>를 다시 볼 수 있다면, 거기서 조용수의 장단, 최영훈의 거문고, 이원왕의 대금, 전계열의 모듬북을 유심히 들어보라. 이것만으로 정말 충분하다. 이렇게 독특한 매력의 소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과거 국립창극단에서 한선하의 가야금이 최고였는데, 지금은 젊은 황소라가 그 대를 이으려 하고 있다. 창극 <리어’> 외국에서 더 큰 호평을 받으려면, 더 그래야 한다. 이건 우리의 자신감의 부족이다. 더욱더 우리의 본질적인 소리를 잘 살려내야 한다. 일본의 가부키에서 음악이 귀에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거기에 바이올린을 함께 편성해서 작품을 만들겠는가!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국립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