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 예술이 공론화되기 시작한지도 7~8년이 지났다. 그런데 다원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도 그렇거니와 형식실험으로든 가치적 양상으로든 그 범주가 여전히 너무 넓다. 공연장과 공연 횟수가 늘어도 일반 관객에겐 아직도 낯설고 규정하기 어려운 장르다. 다원 예술은 상당 부분이 비주류 예술로서 제도권 예술이 행하지 못하는 저변의 이슈를 건드리고자 노력해 왔다. 그렇다면 당연히 대중들의 관심과 이해의 영역 안에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실천 방식이 난해한 경우가 많다. 작품의 의도와 과정을 보건대, 퍼포먼스의 시위성이나 수평적 네트워크로 진행되는 협업 등 본질적인 의미를 추구하기보다는 지나치게 멋을 부리고 신조어들을 경쟁적으로 만들어내면서, 그 방향이 아이디어 경합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이 같은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다원 예술이야말로 현대인의 대표적인 불안 징후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즈음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인식장애극장’을 만났다.
인식장애란, “의학용어로서 시각적으로 습득한 정보를 자신의 경험과 통합하여 인식하는 과정에 장애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 프로젝트는 미술관에서 벌어지는 “관람객들의 정보와 의미에 대한 불일치”를 인식장애로 보고 미술관을 이러한 인식장애가 발생하는 극장으로 설정했다. ‘인식장애 극장’은 총 3개의 프로젝트로 진행되는데 작품 모두를 관람하고 리뷰를 하는 것이 옳지만, 사정상 이번 지면에서는 제1장 <형상 없는 미술관>만 다루게 되었다. 이 제목은“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형상 없는 미술관’의 컨셉으로 건축되었다는 점에서 착안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미술관이라는 유형의 실체가 아닌 미술관 안의 형상 없는 존재들에 주목한다. 미술관에서 존재하고 있지만, 관람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삼아 퍼포밍을 하겠다는 것이다. 미술관을 사유하는 퍼포먼스다.
다섯 명의 퍼포머가 복도와 계단, 로비 등 미술관의 전시실이 아닌 통로 혹은 구석에서 퍼포밍을 한다. 이 공간들은 전시실과의 연결 공간이다. 관람객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그저 통과하는 장소다. 퍼포머를 발견한 관람객들이 발길을 멈추고 관심을 보인다. 사진 촬영도 하고 심지어 의자나 바닥에 앉아서 장시간 관람을 하기도 한다. 평소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공간이 무대가 되었다. 까만 옷을 입은 퍼포머들은 소도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특별히 눈에 띄는 분장도 하지 않은 채 하얀 벽 또는 바닥을 향해 각각의 장소가 보유하고 있을 보이지 않는 형상들을 채취하고자 애쓴다. 무형의 형태를 새롭게 구축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
온 종일(오전 10시~오후 9시까지) 지속하는 퍼포밍에, 이미 익숙해진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동거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 입장한 관람객들이 다시 그들에게 호기심을 표한다. 이러한 현상은 반복된다. 오후가 되자 관람객의 수가 증가하고 이들의 퍼포먼스는 거리 공연을 연상케 하며 관람객들의 구경거리로 노출된다. 공간에 여러 가지 의미가 부여되고 제거되기를 반복하면서 하루가 저문다. 퍼포밍의 장소에 따라 상황은 차이가 크다. 출입구 근처 로비는 관람객의 관심을 많이 받지만 후미진 복도에서의 퍼포밍은 눈에 잘 띄지 않아 퍼포머는 줄곧 관람객의 관심 바깥에 머물기도 한다.
1층 전시실과 2층 전시실을 연결하는 계단에서의 퍼포먼스는 다른 공간과는 좀 다르다. 계단의 층계마다 작은 악기들을 늘어놓고 흰색 드레스를 입은 퍼포머는 차례차례 악기를 들어 정상적으로 연주를 하기 보다는 소리를 낸다. 대부분의 악기는 소형 타악기가 많고 외국의 민속 악기들도 보인다. 기타를 들고 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관람객들은 계단 맨 아래에서 올려다보거나 맨 위층에서 내려다본다. 이따금 퍼포머의 곁을 지나 좁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주 단순한 발상인 것 같지만, 은근히 흥미로웠다. 어둡고 침침한 계단, 정식 통로라기보다는 비상구 같은 계단이다. 마치 무대 뒤 분장실에 숨어든 것처럼 퍼포먼스와 관람자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인식장애 극장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두 번의 공연을 모두 관람해야겠지만 <형상 없는 미술관>에서 우리는 이미 평소에 무의미하게 스쳤던 장소, 보지 않았던 곳을 보았다. 각각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어렵지 않게 체험했다. 우리가 미술품을 관람하면서 발생하는 인식장애의 체험은 두 번째 작품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각각 다른 예술가들의 독립적인 작품이지만 <형상 없는 미술관>은 다른 두 작품의 전초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 대해 말하면서 안무가 정영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이력은 이미 잘 알려졌지만 연극배우 겸 무용수로서 그는 언어와 몸의 매개능력이 탁월하다. <형상 없는 미술관> 역시 매우 설득력 있는 이론을 바탕으로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으면서 관객과의 소통을 중시한 실천성이 강한 예술로의 행보를 보여줬다.
이번 기획의 취지가 난해한 현대미술에 대한 비아냥은 아닌 것 같다. 현상을 파악하고 제시하는 작업으로 보인다. 인식장애는 예술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는 안국역 근처는 공공건물들이 밀집된 곳이다. 시각적으로는 인지하면서 인식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공간들, 미술관 옆 경복궁도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인식장애극장이 아니던가...
글·사진_ 서지영(연극평론가, 드라마투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