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쇼이발레단의 레퍼토리는 크게 서너 개의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 <백조의 호수>나 <지젤>과 같은 고전발레, 1964년부터 30년이 넘도록 볼쇼이발레단의 예술감독을 맡았던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드라마틱한 작품들, 그리고 조지 발란신 이후 서구의 모던 발레와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창작 작품들이다. 지금도 거의 매 해 새로운 작품을 올리고 있는데,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볼쇼이발레단이 비 러시아 안무가인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와 작업한 첫 번째 작품이다.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역시 그가 예술감독으로 있는 몬테카를로발레단 이외의 발레단과 처음으로 작업한 작품이 바로 <말괄량이 길들이기>이다. 볼쇼이발레단의 의뢰로 2014년 초연을 하였는데, 그 해는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으로 전세계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공연했었다. 이 작품도 그러한 맥락에 있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볼쇼이는 2014년 초연 이후 매 해 공연하고 있으며 올해도 4월과 5월 무대에 올렸다.
Photo by Mikhail Logvinov/Bolshoi Theatre.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그의 특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무대에 러시아의 색채를 맛깔스럽게 섞어 요리한 작품이다. 어니스트 피뇽-어니스트는 양쪽 계단과 비탈, 몇 개의 기둥과 의자 소품이 전부인 미니멀한 무대를 디자인했는데, 온통 하얀 무대는 조명의 변화로 장면 분위기를 연출한다(조명디자인은 도미니크 드리요가 맡았다). 마이요는 볼쇼이의 테크닉과 다이내믹함을 살리면서 때로는 섬세하고 때로는 직설적인 감정선을 절묘하게 조화시켰다. 원작에 대한 안무가의 재해석은 과하지 않으면서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린다. 제목과 달리 여기엔 말괄량이나 이를 길들이는 조련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양한 유형의 인물이 있고 그들이 각자의 짝을 찾을 뿐이다.
가장 중심 커플은 카타리나와 페트루치오로 이 둘은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 만큼 강한 캐릭터의 소유자다. 카타리나는 손톱을 세우고 발길질을 하거나 골반을 빼고 비뚜름하게 서서 시니컬하게 반응한다. 코르셋올인원에 초록색 로브를 두르고 등장한 카타리나는 비앙카의 구혼자들의 장난에 희롱당하는 순간 로브를 벗어던지고 당당하게 그들을 응징한다. 그런 카타리나에게 같은 수준의 야성으로 접근하는 자가 바로 페트루치오다. 검은 깃털이 날리는 코트를 입고 멜빵을 불량하게 걸친 채 마치 야수처럼 등장하는 페트루치오는 그 포스로 상대를 제압할 만도 한데 카타리나는 그조차 가소롭게 대한다. 그 둘은 계속해서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공격을 하지만 또 그만큼 되받아치는 상대 또한 서로 뿐이다. 티키타카의 수위가 결혼식에서 정점을 찍고 위험을 넘어설 찰나, 둘만 남게 되는 신혼 밤에서야 서로에 대한 공격이 실은 관심이고 사랑이며 탐닉이었음을 깨닫는다. 서로 물고 뜯기만 하다가 신체의 말단부터 스치듯 닿으며 마음을 여는 둘은 사랑을 나눌 때에도 화끈하다. 그렇게 비로소 소울메이트를 찾고 나서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이야기, 그것이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판 <말괄량이 길들이기>다.
Photo by Elena Fetisova/Bolshoi Theatre.
또 다른 커플인 비앙카와 루첸시오는 작품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춤을 춘다. 마이요는 이 작품에 쇼스타코비치의 여러 음악들을 배치시켰는데, 특히 첫눈에 서로에게 반한 비앙카와 루첸시오가 사랑의 기쁨에 취하는 1막의 듀엣에서 <로망스>의 아름다운 선율은 극장 전체를 한 호흡으로 감싼다. 눈부시게 하얀 상의에 파란 스커트를 입은 비앙카는 사랑을 갈구하는 깜찍발랄한 캐릭터이며 루첸시오는 단정하고 책을 좋아하는(재미는 없어 보이는) 남자다. 바이올린 솔로에 맞춰 시작하는 춤은 서로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면서 마음을 졸이다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찰나 그 커지는 마음만큼 오케스트라로 증폭되며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한다. 마이요는 첫사랑의 설렘과 긴장을 손끝과 발끝으로, 몸이 스치듯 애가 타는 이인무로 탁월하게 표현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장면의 그 설렘와 떨림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마이요는 그 외의 두 커플도 양념처럼 버무려 맛을 배가시킨다. 돈 많은 그레미오에게 정착하고 싶어 하는 관능적인 가정부는 공연의 막이 오르기 전에 이미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검정 바지에 한쪽 어깨를 드러낸 깃털 의상을 입고 스틸레토 힐을 신고 등장하는 그녀는 무대 한가운데에서 토슈즈로 갈아 신으며 공연 시작을 지휘하는데, 가정부에 대한 통상적 관념을 깨는 멋진 캐릭터다. 한편, 육체미를 자랑하는 호르텐시오에게 푹 빠져있는 과부는 그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비앙카에게 구애를 하다 거절당하는 호르텐시오를 위로하고 그녀에게 가지 못하도록 차단하며 사랑을 쟁취하는 그녀는, 눈을 가리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정 드레스를 입었지만 그 속에 간직한 욕망을 숨길 수는 없다.
Photo by Elena Fetisova/Bolshoi Theatre.
비앙카와 루텐시오의 결혼식에 말끔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등장한 카타리나와 페트루치오에게 모두 놀라는 사이,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Tea for Two〉가 시작된다. 혁명 직후의 소련은 서구 문화와 아방가르드, 재즈 등이 유행하던 놀라운 시기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친구와의 내기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재즈곡 〈Tea for Two〉를 45분 만에 완벽히 오케스트레이션 해냈다고 하는데, 그리가로비치의 <황금 시대>에도 등장하는 사랑스런 곡이다.
주변이 안보일 정도로 상대에게 푹 빠져있는 커플, 한눈을 팔고 질투를 하는 커플, 지루해하다가 또 욕망에 불타오르는 커플, 이들이 차를 만들어 건네고 받아 마시는 다양한 모습 속에서, 사랑하고 길들여지며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과연 달콤하고 유쾌한 깨달음이다.
Photo by Elena Fetisova/Bolshoi Theatre.
글_ 이희나(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