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2회째를 맞이한 대한민국발레축제가 7월 2일 춘천과 제주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올해 축제는 예술의전당이 2019년 이후 4년 만에 공동주최자로 돌아와 지난 2년간 코로나 팬데믹으로 위축되었던 축제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더욱 풍성해진 프로그램들을 선보였고, 서울에만 편향되었던 축제의 무대를 춘천과 제주까지 넓히기도 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두 편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란히 올려졌다는 점인데, 허용순은 예술의전당과의 공동제작으로 2막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6월 23-24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을, 김용걸은 공모 공연으로 35분가량의 단편작 <로렌스>(6월 16-17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를 선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흥미로운 공연들이 많았던 축제이지만 본고에서는 축제 참가작들 가운데 진화하는 무대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안겨준 두 편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리뷰 대상으로 한정하였다.
현대로 온 허용순의 <로미오와 줄리엣>
단언컨대 허용순은 국내 발레계가 가장 사랑하는 안무가다.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광주시립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 발레블랑에 이르기까지 국공립과 민간발레단을 망라하며 안무 작업을 해 왔고, 대한민국발레축제와 케이발레월드 등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축제의 메인무대에서도 다수의 작품을 선보여 왔다.
대한민국발레축제와의 인연도 깊은 편인데, 2016년에는 초청공연으로〈Contrast〉와〈The Edge of Circle〉을, 2019년에는 유니버설발레단과의 협업으로〈Imperfectly Perfect〉를 공연했고, 이번 축제에서는 예술의전당과의 공동제작으로 전막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을 선보였다. 허용순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2007년 독일 슈베린-메클렌부르크주립극장에서 초연된 뒤 2014년 아우크스부르크극장에서 재공연이 올려졌고, 국내 무대에서는 2017년 광주시립발레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번 공연은 전막 프로덕션 시스템을 탑재한 발레단의 초청공연이 아니라 축제 사무국에서 무용수 선발에서부터 리허설 전 과정을 관리하며 전막 공연을 성공적으로 올렸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대관 극장이었던 예술의전당의 제작극장으로서의 역량을 확인시켜주었다는 의미 또한 작지 않다.
작품은 원작의 줄거리를 비교적 꼼꼼하게 따라가되, 카풀렛트(본고의 인명은 공연프로그램북의 표기를 그대로 따른다) 가문에서 열리는 가면무도회 장면을 제외한 다른 장면들은 매우 현대적으로 연출되었다. 공연 도입부에서 카풀렛트와 몬테규 가문의 젊은이들은 당구장에서 싸움을 벌이고, 그들이 다시금 충돌하는 베로나광장 역시 젊은이들이 따가운 햇살 아래 병맥주를 즐기고 있는 현대 이탈리아의 광장으로 꾸며진다.
물론 이 당구나 병맥주라는 기호를 현대의 젊은이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 젊은이들에 대한 또 다른 대상화라는 비판 또한 제기될 수 있으며, 이때의 ‘현대적’이라는 평가 역시 셰익스피어의 원작 희곡이 발표된 당대 분위기를 살리는 데 주력한 다른 안무가들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두 가문 젊은이들이 충돌하는 몇몇 장면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1950년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각색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이민자 집단 간 갈등이라는 새로운 서사를 부여했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달리 허용순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현대적 버전으로 머문다.
원작의 스토리가 그대로 유지되는 듯하지만 인물들의 성격이나 개별 서사는 좀 더 세밀해졌다. 관객들은 장 크리스토프 마요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조카인 티발트와 사랑에 빠진 카풀렛트 부인을 이미 만난 적이 있지만 부재하는 남편을 대신해 가주로 등장하는 마요의 카풀렛트 부인과 달리 허용순의 카풀렛트 부인은 무도회에서 남편 몰래 티발트와 손끝을 스치는 등의 은밀한 스킨십으로 불륜의 스릴을 즐기는 인물이다. 로미오의 친구들인 메큐치오와 벤볼리오는 서버로 위장해 카풀렛트 가문의 무도회에 숨어든다. 줄리엣의 유모는 클래식발레에서는 보기 어려운 안경을 쓴 모습으로 등장하며, 그가 줄리엣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베로나광장에서 로미오를 찾아다닐 때 코믹한 장면으로 삽입되기 일쑤인 성희롱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30여 명의 출연자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무대를 만들어낸 무용수는 단연 윤별이었다. 메큐치오를 맡은 윤별은 살아 있는 연기로 극의 감초를 뛰어넘어 등장하는 장면마다 주인공 못지않은 존재감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로미오가 사랑을 고백하는 발코니 장면이나 만토바로 추방령을 받고 떠나야 하는 이별 장면 등과 같이 줄리엣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절절한 감정을 실은 파드되로 객석을 사로잡는 것과 달리 그 외의 장면에서는 두드러지는 존재감을 보이는 역할이 아니라는 점에서 메큐치오는 조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만나는 무도회에서 둘 사이에 오가는 심상치 않은 기류에 장내에 긴장감이 감돌 때도, 베로나광장에서 티발트와 대립하며 결투에 나설 때도, 윤별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끌어올리거나 반대로 더욱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무대를 자유자재로 쥐락펴락했는데, 작품이 주인공만의 것이 아님을 몸으로 증명한 무대였다.
운명에 패배하는 인간, 김용걸의 <로렌스>
김용걸은 대한민국발레축제가 올해로 12회째 무대를 올리기까지 축제 참가자 가운데 가장 많은 공연을 선보인 안무가다. 그는 2011년〈Work I〉으로 처음 축제에 참가한 뒤〈Inside of Life〉,〈step by step〉, <키스> 그리고 지난해 참가작 <하늘, 바람, 별 그리고 시>에 이르기까지, 2020년 한 해를 제외하고 매년 축제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올해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극중 로렌스 신부를 주인공으로 각색한 신작 <로렌스>를 선보였다.
안무가들이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각색하며 스토리나 캐릭터 면에서 각자의 해석을 보여주면서도 대부분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과 달리 김용걸은 음악을 바꾸는 나름의 파격을 단행했다.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사용하지 않은 <로미오와 줄리엣>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모리스 베자르가 1966년 20세기 발레단에서 안무한 작품으로, 이때 베자르는 베를리오즈의 음악을 사용했는데, 2007년 사샤 발츠도 오페라와 발레가 결합된 <로미오와 줄리엣>을 안무하며 베자르와 같은 음악을 사용했다.
김용걸은 자신만의 새로운 <로미오와 줄리엣>을 안무하기 위해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를 배경음악으로 삼았다. 이 곡은 리스트가 남긴 유일한 피아노 소나타로, 통상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로 3~4악장의 구성을 갖는 일반적인 소나타 형식이 아닌 단일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연주자가 잠시의 숨 돌릴 틈도 없이 곡이 끝날 때까지 연주를 이어가야 하는 난곡이기도 하다. 1963년 영국 로열발레단 예술감독이었던 프레데릭 애쉬튼이 당시 발레단의 간판무용수였던 마고트 폰테인과 루돌프 누레예프를 위해 안무한 <마그리트와 아르망>에 사용된 그 음악이다.
애쉬튼은 <마그리트와 아르망>을 안무하며 리스트가 음악 속에 심어놓은, 운명에 저항하다 마침내 패배에 이르는 고결한 인간의 비극적인 투쟁을 파리 최고의 코르티잔으로 군림했던 『춘희』의 주인공 마그리트(뒤마의 소설 주인공 마르그리트의 영국식 이름)의 심리 드라마로 재해석했다. 그리고 김용걸은 애쉬튼이 마그리트를 위해 마련했던 자리에 원작의 주인공인 로미오나 줄리엣이 아닌 로렌스 신부를 세우고 있다.
김용걸의 해석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하는 지점은 그의 로렌스 신부가 남성이 아닌 여성 무용수라는 것이다. 이 같은 젠더 벤딩은 최근 몇 년간 다수의 연극 무대에서 활발히 시도되고 있고 <신과 함께>, <에드거 앨런 포>, <더 데빌> 등과 같은 몇몇 뮤지컬 공연에서도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배역과 배우의 성별 고정관념을 전복시키는 무대를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성 역할에 대해 전통적인 시각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무용계, 그것도 의상에서부터 인사법까지 공연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에 성별에 따라 다른 양식을 부여하고 있는 발레 공연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젠더 벤딩이라는 점에서 파격이라는 표현을 붙일 만하다.
공연은 검은 사제복 차림의 로렌스가 성당 기도실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쩐 일인지 그의 얼굴에도, 어깨에도, 뒷모습에도 수심이 가득하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로렌스는 원수 가문의 두 젊은이가 사랑으로 결합한다면 가문의 화해를 이뤄낼 수 있으리란 낙관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김용걸의 로렌스는 앞으로 다가올 파국을 예감한 듯 결혼을 극구 반대하다 둘의 간절한 애원에 마지못해 식을 올려준다. 원작에서는 로미오가 줄리엣을 무도회에서 만나기도 전 “시작하자마자 오늘밤 파티에서 그것이 끝나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운명 같은 파국을 예감하는데, 김용걸은 그러한 예감을 로렌스에게로 옮겨놓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무대로 옮긴 <빛, 침묵 그리고…>를 발표한 뒤 김용걸의 안무세계에서 ‘신의 무능’ 혹은 ‘무능한 신’은 매우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도 로미오와 줄리엣이 맞이한 비극의 상당 부분은 로렌스의 무능(혹은 불운)에서 기인하는데, 원작의 로렌스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이라면 김용걸의 로렌스는 어떤 방법으로도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다. 원작의 로미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파국에 휩쓸린 것과 달리 김용걸의 로렌스는 파국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피하지 않고 그 파국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이 파국이 로렌스의 것이 아니라 사랑에 운명을 건 두 연인의 것이라는 점에서 로렌스는 리스트가 원곡에서 묘사한 고결한 인간이 아니라 무능한 신으로 남는다.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하고 불멸이 된 두 연인과 반대로 로렌스는 예감했던 대로 닥쳐온 파국 앞에서 살아 있는 내내 그 파국을 곱씹어야 할 것이다.
김용걸은 로렌스에게로 작품의 무게중심을 옮기면서 줄리엣과 줄리엣의 주변인물 몇 명만을 남겨놓았다. 로미오의 친구들이나, 로미오와 친구들과 대립각을 이루는 티볼트가 극에서 사라지고, 줄리엣의 친구들 역시 등장하지 않는다. 로렌스, 로미오와 줄리엣, 줄리엣의 어머니와 아버지, 유모, 정혼자인 파리스까지 총 일곱 명이 전부다. 등장인물은 줄었지만 오히려 줄리엣의 부담은 커졌다. 35분 동안 줄리엣은 로미오와 사랑에 빠지고(극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만남이 생략되고 둘은 이미 사랑에 빠진 연인 사이로 무대에 등장한다), 로렌스에게 결혼을 청원하고, 어머니, 아버지, 유모를 상대로 파리스와의 결혼을 거부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로렌스와 줄리엣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극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부여받지 못하고 줄리엣의 결혼을 둘러싼 도구로만 소모된다. <마그리트와 아르망>의 이야기가 원작보다 대폭 간소화되어 마그리트와 아르망, 아르망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과 비교가 되는 지점인데, 재연에서는 중심인물과 주변인물의 역할과 비중에 대해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대한민국발레축제추진단 사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