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환(哀歡)이란 무엇일까? ‘삶의 애환’이란 말을 쓴다. 작품을 설명할 때도 애환이란 말은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다수가 착각하는 게 있다. 애환을 내세운 작품은 거의 슬프다. 슬프기만 하다. 때론 청승스럽기까지 하다. 그게 애환일까? 아니다. 애환은 두 개의 감정을 동시에 이르는 말이다. 슬플 애(哀)와 기뻐할 환(歡)이 넘나드는 것이 애환이다. 어떤 작품이 ‘애환’을 제대로 그려낸다면, 슬픔과 기쁨을 모두 담아내면서 이 둘을 모두 초월해야 한다.
부산시립무용단의 <바다 곁에 오래였으나 바다를 제대로 본적이 없다>(이하 <바다>)는 부산 중앙동에 위치한 40계단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다. 무대 뒤편에 40계단을 연상하는 세트가 설치되어 있고, 이를 비교적 잘 활용했다. 작품을 설명하는 글에서 ‘6.25 전쟁과 같은 상처와 애환의 역사가 밴’ 40계단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내 시각에서 <바다>는 애환을 ‘슬픔’으로 기울어진 것은 아닌가 싶다.
<바다>는 세 남자의 시점을 풀어낸다. 유감스럽게도 세 남자에게 공감하게 되지 않는다. ‘연기도 아닌 것이, 춤도 아닌 것이’라고 얘기해도 좋을까? 긍정적으로 본다면, ‘연기반, 무용반’이다. 그런데 이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모두 오래된 연극의 한 장면 같다. 공감의 폭이 크지 않다. 이정윤 예술감독의 시각으로 이 장면을 보면 긍정적일 수 있다. 부산시립무용단을 이끄는 예술감독으로서, 무용단의 중심이 된 중견 단원에 대한 애정과 배려로 해석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관객의 측면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공감의 폭은 낮다. 이런 장면을 풀어내는 방식은 어떠해야 할까? 확실히 연극적이거나, 보다 더 무용적이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크다.
이번 작품은 부산 태생의 중견 안무가 이정윤의 야심작이다. 전체적으로 스토리를 강조하는 무용극의 범주에서 이 작품을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무용극 역사에 있어서, 남성 주인공의 계보로 볼 때, 이정윤은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 국립무용단의 주역무용수로 활약했다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소품에서도 이정윤은 춤을 통해서 극성(劇性)을 잘 끌어낸다.
이정윤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을까? 나는 이번 작품이 ‘한국의 역사’ 및 ‘지역의 정서’를 두루 수렴하는 21세기형 무용극의 수작으로 탄생할 것이라고 예감했다. 두루 호평을 얻어낸 작품임은 분명하나, 내게는 그렇지 못했다. 무용극의 역사에 있어서, 지난 세기 송범과 국수호의 역할과 역량은 대단했다. 국립무용단의 계보와 주역무용수의 세대별 흐름을 살필 때, 송범-국수호-이정윤을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앞의 두 사람에 비해서, 이정윤의 이번 작품은 동일선상에 놓기엔 아쉬움이 있다. 내가 송범과 국수호와 같은 무용극을 원하는 것이어서 그럴까? 아니다. 오히려 지난 세기의 걸작과 다른 21세기의 걸작이 나오길 바랐다.
드라마적인 면에서 보면, 특히 이 작품은 21세기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휴식 없이 80분을 이끌어가는 것엔 박수를 보내지만, 매우 세분해서 7개로 나눈 장의 구성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각 장별로 주제를 던져주고, 관객에게 그것을 느끼게 하는 의도가 강했다. 특히 무용예술이 설명보다는 ‘표현’이 앞서야 하는데, 작품의 어떤 부분에서는 ‘설명’을 듣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담아내는 이야기가 전 시대적 고루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건 이정윤의 무용적 한계가 아니라, 이정윤의 작가적 한계다. 이 작품을 보면서 ‘드라마터그’의 한계를 절감했다. 만약 이정윤의 대본을 바탕으로 해서 극작술(劇作術)에 익숙한 누군가가 이를 관객의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했다면 공감의 폭은 좀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런 상태였더라면 이를 바탕으로 한 이정윤의 안무가 더 살아나지 않았을까 싶다. 개별적으로는 장면은 괜찮으나, 전체적인 연결이 성글었다는 건, 이정윤이 앞으로 대본을 병행하려는 입장이라면 반드시 새겨야 할 것이다. 작품을 보면서 관객은 계속 감정이 쌓이면서 몰입을 해야 하는데, 이 작품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닌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바다’와 ‘부산’, ‘40계단’과 ‘헤어짐’의 정서가 겹겹이 쌓이질 못했다.
영상을 살리려는 의도였을까? 이정윤은 무대의 전면을 파도로 채운다. 그 강렬함은 살아났다. 그러나 그 반면 무용수들은 때론 무대의 주체라기보다는 객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음악도 개별적인 선택은 괜찮았으나, 이것을 음악적인 입장에서 보면 전체적인 흐름이 좋다고는 보기 어렵다.
특히 거문고가 등장하는 장면은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나는 이정윤의 전작에서 무대 뒤에 배치한 거문고를 보면서 크게 감동 받았다. 작곡도, 연주도 좋았거니와, 이것과 합치되는 이정윤의 안무와 무용수의 매력적인 춤이 참 좋았다. 이번 경우는 내 입장에선 ‘호’는 아니다.
무대 앞에서 강렬한 원색의 레드드레스를 입은, 거문고 연주가가 등장해서 연주하는 모습이 부담스러웠다. 음악은 북한에서 만들어진 거문고곡 <출강>과 함께 무대 밖의 연주가들이 <희망가>를 덧붙여주면서, 거문고 연주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그들의 애씀은 느껴지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거문고 중심의 이 장면은 모든 것이 따로 노는 느낌이 강했다.
<바다>는 분명 무용공연이 아닌가? 이 장면에선 ‘무용도 아닌 것이, 연주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이 장면을 어떻게 긍정적인 시각으로 볼 것인가 객석에서 애쓰는 내 모습이 다소 측은하게 느껴졌다. 앞의 장면은 그래도 ‘무용반, 연극반’으로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 장면은 ‘무용반, 연주반’이라고 하기엔 너무 따로 노는 느낌이 강했다. 이런 연주 중간에 악보를 그리거나, 지휘를 하는 모습도 연극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매우 어색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껄끄러운 장면과 함께, 6명의 남성무용수가 가세했다. 이들은 거문고의 6현(絃)을 상징한다고 들었는데, 솔직히 나는 그런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상의를 벗은 무용수는 제법 세련된 동작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들은 마치 ‘제2의 이정윤’을 꿈꾸는 듯 보였다. 그러나 역시 이 춤과 음악이 얼마만큼 부합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부산시립무용단과 만난 이정윤의 안무작품은 대체적으로 우수했다. 앞으로 이정윤은 대한민국을 대표할 안무가로서 더욱 성장할 것이다. 그런 인물에게는 결코 찬사만을 보낼 수 없다. 특히 이번 작품은 이정윤의 다른 안무작에 비교할 때, 허점이 매우 많은 작품이다. ‘부산’과 ‘역사’라는 중압감 속에서, 이정윤은 다소 방향을 잃었고, 이정윤 안무의 여러 장점이 도드라져 보이지 못한 한계가 분명하다.
<바다>는 이렇게 비평적 안목으로 준엄하게 비판을 받을 부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것을 모두 잊게 해주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이정윤이 만들어낸 엔딩씬은 훌륭했다. 무대에 시원하게 비를 내리게 한 것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다. 모든 무용수가 함께 보여주는 일련의 동작은 감동에 감동이었다. 거기엔 이정윤의 춤의 어법이 잘 녹아있었다. 이정윤이 이 작품을 왜 만들었는지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정윤이 지향하는 ‘공동체적 춤’과 ‘부산적인 호쾌한 정서’를 그 춤을 통해서 느껴졌다. 부산시립무용단의 단합된 역량을 거기서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여러 한계를 드러낸 작품이나, 마지막 장면 하나만으로도 모든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앞으로의 성공을 예감하게 해주는 희망의 군무임에는 틀림없었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부산시립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