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을 느끼는 것은 인종과 성별, 문화를 뛰어넘어 동일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했던 수작이 모처럼 한국관객을 찾아 반가운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영국에서 활동하며 세계적 인물로 성장한 아크람 칸의 <데쉬(Desh)>가 그것이었다(6.14-15, LG아트센터). 아크람 칸은 일반적 영국인을 상상하는 우리에게 자그마한 키에 검은 피부로 인해 의외라는 첫인상을 주지만 방글라데시 이민 2세라는 그의 배경을 알면 ‘아!’ 하는 수긍의 미소를 짓게 한다. 국내에서는 실비 길렘과의 <신성한 괴물들>, 줄리엣 비노쉬와의 <in-i>, 아크람 칸 컴퍼니의 <버티컬 로드>를 통해 알려진 그는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의 안무를 맡는 등 그 예술적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최근작 <데쉬>는 1시간이 넘는 솔로로, 그간 솔로를 두려워했던 그가 이를 극복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투영한 작품이다. 제목 '데쉬'는 벵골어로 '고국'이라는 뜻이며 공연은 이민 1세대와 2세대가 느끼는 이질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맥상통하는 정체성에 대한 날카로운 해부였고, 2011년 방글라데시 독립 40주년에 맞춰 만든 탓에 정치색도 강했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를 모르는 한국 관객들에게도 거부감을 주지 않은 이유는 작품을 이끌어가는 뛰어난 연출력과 다매체의 성공적 협업, 무거운 주제를 위트 있게 풀어나가는 여유에 기인했다. 특히나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다룸에 있어서는 한 국가의 지나온 발자취를 즉각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각화했고, 정치적 지배를 떠나 모국어를 포기할 수 없었던 선대들의 뼈아픈 역사가 우리의 과거 역사와 맞물리며 가슴 뭉클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공연은 전날의 무리 탓인지 근육통으로 30분이 지연되었지만 그 기다림이 아깝지 않았다. 공연은 8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는데, 시작과 더불어 수미상관(首尾相關)의 형식을 암시하며 무대에는 작은 무덤처럼 보이는 봉긋한 미장센이 등장하고 그곳의 작은 나뭇가지와 흙은 방글라데시의 근원적 원형을 상징했다. 아크람 칸은 이곳을 큰 망치로 내리치며 과거를 일깨웠는데, 결국 그 무덤은 아버지의 무덤이기도 했고 고국의 무덤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후 핸드폰 고객센터와의 전화내용을 다룬 장면, 자신의 민머리에 펜으로 얼굴을 그려 자신의 아버지로, 자신의 과거로, 어린 조카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삼촌으로 분해가며 열연하던 장면 등은 기억에 생생하다. 수십 개의 얼굴로 바뀌는 중국의 ‘변검’이나 한 작품 속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그 모습을 바꾸는 ‘카탁’처럼 캐릭터의 특징을 살려 연기하는 아크람 칸은 무용가이자 연극인이었다.
더불어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이었던 장면은 조카와의 대화에서 이뤄지는 동화적 상상을 표현한 애니메이션과 몬순을 연상시키는 백색 대형 버티컬 속에서 유영하듯 움직이는 초현실주의적 모습이었다. 동화 속 일부가 된 그를 보는 관객들의 눈은 방글라데시의 정서와 깊이를 투영한 가상 세계에서 그 무엇을 더 볼 수 있을까?라는 가능성의 장을 열어둔 부분이었고 버티컬 속의 그는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자유로운 개체였다. 그 미지의 아름다움들이 전혀 슬픈 부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눈물 나게 하는 이유는 그러한 카타르시스의 경험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춤의 측면에서 그의 이질적인 움직임 어휘가 다소 답답하고 투박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았으나 그로인해 그 진솔함과 진정성이 빛바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나 개념무용에 입각해 순수한 움직임을 배재하고 개념에 침착하는 경향에 빗대어 볼 때 대사와 춤의 적절한 조합 속에서 움직임의 본질이 강조되었다. 후반부 큰 의자와 작은 의자를 효율적으로 사용해 새로운 공간을 연출하고 발바닥이 잘려나간 요리사의 얘기와 또 다시 등장한 고객센터와의 통화 등이 과거와 현재의 멀티미디어가 공존하는 세계를 담고 있었다.
결국 개인의 서사와 역사가 날줄과 씨줄로 엮이며 치밀한 구성을 이뤄낸 일각에는 영화 ‘ 와호장룡’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팀 입(Tim Yip)의 감각적인 무대와 뛰어난 애니메이션 영상, 영화 ‘아이드 와이즈 셧’, ‘베니스의 상인’의 작곡가 조셀린 푸크(Jocelyn Pook)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음악, 칸의 오랜 파트너인 마이클 헐(Michael Hulls)의 조명이 크게 기여했다.
아크람 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지성(知性)과 ‘카탁’을 현대무용과 접목해 완성한 움직임 특성(회오리치는 회전, 꿈틀거리는 팔 움직임, 민첩한 발놀림) 등을 바탕으로 다른 유명인들에게 기대지 않아도 충분히 무대장악능력을 보여주었다. 시어터적인 표현과 움직임이 조화를 이뤄 특별한 명장면들을 무대 위에 그려내는 순간 느껴졌던 감동은 천재적 재능과 열정,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빚어낸 총체적인 드라마였다.
글_ 장지원 (무용평론가,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LG아트센터 제공
*이 글은 월간 춤과 사람들의 평론칼럼에 게재되었던 글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