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정동극장 레퍼토리 공연 <적벽>이 8월 20일부터 9월 29일까지 다섯 번째 시즌으로 돌아오면서 정동극장이 아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로 무대를 옮겼다. 2016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에서 뮤지컬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고, 2017년 정동극장에서 우리 예술의 소재 발굴과 작품 개발을 위한 창작 무대로 마련한 ‘창작ing’ 사업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선정된 후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 연속 공연되며 정동극장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적벽>은 중국소설 『삼국지연의』를 저본으로 형성된 판소리 <적벽가>가 원작으로, 원작의 흐름을 대부분 그대로 따라간다. 유비, 관우, 장비가 형제의 의를 맺는 도원결의와 이들이 제갈공명의 초막을 세 번이나 찾아가 책사로 기용하는 삼고초려 장면을 지나면 조조의 대군에 맞서는 장판교 전투, 미부인의 자결과 조자룡의 활약, 제갈공명이 일으킨 동남풍으로 조조를 패퇴시키는 적벽대전까지 숨돌릴 틈 없이 속도감 있는 전개가 이어진다.
<적벽>의 공연 브로셔에는 이 작품을 ‘판소리와 춤의 화려한 대전’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22명의 소리꾼이 개별 등장인물을 맡아 노래와 연기를 펼치는 공연 형식은 판소리보다 창극에 가깝지만 출연자들의 소리 못지않게 춤의 비중이 커 노래가 가미된 무용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른바 ‘판소리 무용극’이다. 출연자들의 춤은 중극장 무대에서 한정된 인원으로 대규모 전투의 스펙터클을 재현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브로셔에서는 현대무용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출연자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같은 동작을 일사불란하게 수행하는 모습이나 삼각 대형을 이루어 절도 있는 군무를 펼치는 모습은 케이팝 댄스에서 추구하는 ‘칼 군무’와도 닮아 있다.
군무를 전투로 만들어주는 것은 출연자들이 저마다 손에 들고 있는 부채다. 출연자들은 부채를 접어서 찌르거나 맞대어 공격에 임하고 활짝 펼쳐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한다. 통이 넓은 바지 위에 덧대어진 주름치마나 갑옷의 깃을 표현한 듯한 주름진 카라 역시 부채를 연상시키며 디자인에 통일성을 더한다. 흰색을 주조로 한 미니멀한 콘셉트에 붉은색과 검은색이 포인트로 가미되어 세련되고 현대적인 인상을 주는 무대, 조명, 의상은 출연자들의 춤과 노래는 물론 영상 효과를 배가시켜 무대에 대한 집중도를 높인다. 원작의 소리를 대부분 살리면서도 국악기에 드럼, 베이스, 건반 등 서양악기 편성을 가미해 현대적으로 편곡된 소리를 들려주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현전하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에서 <적벽가>는 함께 전승되는 다른 작품들과 다소 결을 달리 한다. 구전설화나 국문소설을 바탕으로 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가 하층 계급의 애환을 담아내며 상민들에게 널리 사랑받았던 것과 달리 한자로 쓰인데다 남성 영웅들의 전쟁 이야기인 <적벽가>의 주된 향유층은 양반과 부자 중인들이었다. 20세기 들어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여성 소리꾼이 다수 배출되고 판소리가 창극화되며 신파극이 크게 유행하게 되면서 ‘남성극’ <적벽가>의 인기는 더욱 위축되었다.
뮤지컬 <적벽>은 창극의 현대화라는 측면 외에도 여성 인물이 거의 없는(원작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은 유비의 아내 미부인 정도다) 원작의 등장인물을 대거 여성 소리꾼으로 캐스팅해 젠더 프리 공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제갈공명과 주유, 조자룡, 서서 등을 여성이 연기하며, 이 외에도 장비, 조조, 정욱 등에 여성과 남성을 더블캐스팅해 젠더 벤딩으로 성별에 따른 역할을 바꾸는 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역할에 대한 성별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이번 공연에서도 장비 역을 맡은 정지혜는 2010년 중앙대에서 선보인 학내 공연 <적벽에 불지르다>에서부터 장비를 맡아 온, ‘남역’ 경험 풍부한 소리꾼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빠르게 낡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전통예술의 현대화는 전통예술인의 창작 지향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됐다. 그러나 많은 공연이 의상과 무대디자인 등 시각적 요소들을 바꾼 정도를 현대화라고 주장하며 ‘전통예술의 전통화’에 지나지 않는 복제품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뮤지컬 <적벽>은 ‘동시대’ 혹은 ‘현대화’에 대한 모범적인 답안지 하나를 제시했다.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국립정동극장